별하나

이성복 시모음

달그리매 2007. 8. 8. 15:05

비단길-*


깊은 내륙에 먼 바다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리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
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
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
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
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
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
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
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灰層이 깊었다

─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 지성사, 1996 


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音樂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하게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牧丹이 시든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소녀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나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를 부를 때,
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숨길 수 없는 노래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
못했기 때문이다 봄 하늘 가득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음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
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슬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 갑니다

이성복/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괴로와하기 전에 기다리고
기다리기 어려울 때
한 번 숨을 끊고 들여다보는 물
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머리 풀듯이 괴로움 풀고
속절없이 한 세상 지나가면
이 물은 다시 흐를 것인가


형벌이여,
민물에 떠밀리는 이끼처럼
지금의 인후咽喉에 남아 있는
최초의 떨림!


시집: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



편 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지성사 >

 

 

편지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
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
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출애급出埃及


1
오늘 다 외로와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이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영화映畵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 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 속에서 한 편의 영화映畵가 되어 펼쳐지자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 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애인愛人,
나는 퀭한 지하도地下道에서 뜬눈을 새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동방박사東方博士들을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천국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욕정慾情에 떠는 늙은 자궁子宮으로
돌아가야 하고
분노忿怒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주主여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느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시집:'90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문학사상사



기다림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罪)에서 지을 죄(罪)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後光), 너는 썩어 시(詩)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熔岩)처럼 가슴 속을
떠돌아 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不穩)한 도랑을 따라
예감(豫感)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