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밥그릇 외
- 깊은 밥그릇 / 유홍준
- 못쓰게 된 밥그릇에 모이를 담아
병아리를 기른다 병아리가
대가리를 망치처럼 끄덕거리며 모이를 쫀다
부리가 밥그릇 속에 뼈져 보이지 않는다
더 깊이 주둥이를 먹이에 박으려고
앞으로 기울어진 몸
발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깊은 밥그릇은, 병아리를 죽인다
전라도 미용실 / 유홍준
먼 수평선을 향해 열려 있다 헝클어진 머리통을 잠시 미용사에게
맡기고 지친 눈을 감는다 아득하다, 묵직하다, 긴 수평선 한 가닥이
내 속눈썹 위에 다가와서 얹힌다 지치고 지친 파도 하나가 내 옆에 와
서 앉는다 가위로 물을 자를 수 있을까 가위로, 파도의 머릿결을 자른
다 물의 머릿결을 말아올린다 웨이브 웨이브 세상의 모든 파도는 파
마머리다 멀고도 먼 곳에서 달려와 기어코 하는 짓이 기껏 세상의 하
초나 핥고 죽는다 안다, 꼬라지만 보고도 다 안다 미용실에 와서 아무
말 안하는 파도는 성질이 못된 파도다 소금냄새가 조금도 안 나는 파
도다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 같다고, 안면이 되게 많다고 반편이 같은
전라도 미용사가 생글생글 웃는다 빤하고도 빤한 이력을 부풀려 나도
대답을 해 준다 공갈을 쳐 준다 오늘도 바닷물로 머리를 감겨주는 이
상한 미용실이 전라도 저편 어딘가에서 성업 중이다
밭고랑에 묻힌 화투짝
밭에 나가 일하다보면
간혹 밭고랑에 반쯤 파묻힌 화투짝 같은 거 발견하게 된다
그림도 생생한 그것 주워들고 싱긋 웃어보게 된다
쓰레기통이나 아궁이에 들어갔어야 할
화투짝이
어떻게 여기까지?
노름장이 아내가 분통이 터져 집어던졌을 것이다
거름에 딸려 왔을 것이다
거름에 묻혀 왔을 것이다
썩지 않는 화투짝을 주워들고
나는 빙긋이 웃으며 들여다본다
버려져도 거름과 함께
밭고랑에 버려진 화투짝은 경고장일 것이다
레드카드일 것이다 마침내 퇴장명령일 것이다
화투짝 집어던진 노름장이 아내, 그녀는 분명 내 어머니일 것이다
열 번을 쓰는 일회용 면도기
일회용 면도기로 아홉 번째 턱수염을 미는 저녁
도대체 나는 왜 출근시간에 쫓겨
저녁에 미리 수염을 깎는가
한 번의 맹세로 충분한 사랑은 종종 애정을 확인하려 들고
한 번의 작성으로 대충 넘어가도 될 기안은
왜 자꾸 재검토 재작성을 요구하는가
한 번 부딪힌 문틀에 나는 왜 번번이 머리를 들이받는가
날 무딘 면도날이 따끔따끔 구레나룻을 잡아 뜯는 저녁
삐죽삐죽 피가 솟아오르는 턱주가리에 화장지를 뜯어 붙이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면도란,
사랑의 맹세나 재검토해야 할 기안처럼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를 밀어야 하는 것
지혈이 될 때까지 지그시 누르고 기다려야 하는 것
골백번 립스틱을 발라도
여자는 제 입술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천만번 입술을 둘러싼 수염을 밀어도 사내는
아직도 무엇을 더 깎고 무엇을 더 쳐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빨간 립스틱 바른 입술과 말갛게 턱수염 민 입술이
포개지는 밤...... 한 번 더
사용하려고 나는 세면대 모서리에 면도기를 턴다
<문학들> 2007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