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와 고월 이장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섯지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넘어 아가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 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 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지지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닷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서름이 어울어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로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1901. 4. 5 경북 대구~1943. 4. 25 서울.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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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시우(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사숙(私塾)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에게 교육을 받았다. 1916년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해 1919년 수료하고,
강원도 일대를 방랑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백기만과 함께 거사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잠시 서울에 피신했다.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동인에 가담했고,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5년 박영희·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참여했고,
1927년 대구에 돌아왔으나 여러 번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의열단 이종암사건에 말려들어 구금되기도 했다. 1937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난 이유로 5개월 정도 옥살이했다.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1937년 이후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교남학교에 권투부를 신설했다. 1940년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위암으로 죽었다.
1946년 경상북도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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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백조〉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단조 單調〉를
발표하고, 이어 〈가을의 풍경〉(1922. 5)·〈나의 침실로〉(1923. 9)·〈이중의 사망〉(1923. 9)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초기 시는 주로 감상과 낭만, 퇴폐와 병적 관능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나의 침실로〉에서는 오지 않는 애인 '마돈나'를
혼자 기다리는 마음을 여러 상징들을 동원해서 보여주었고 신비롭고 관능적인 표현을 썼다. 이 작품은 기법상 미숙한 점도 있으나 시상이 풍부하며,
여기서의 '마돈나'는 '아씨'도 되고 '마리아'도 된다. 1925년을 전후해서 당대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개벽〉 5월호에 발표한 시
〈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 등과 평론 〈무산작가와 무산문학〉(개벽, 1926. 1~2)·〈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문예운동, 1926. 1) 등을 발표했다. 1926년 〈개벽〉 6월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지은이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대표시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국토는 잠시 빼앗겼을 망정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초기 시에서 볼 수 있는 까다로운 한자어를 피하고 순한글로 썼을 뿐 아니라, 각 연의 2·3행을
길게 했는데 이러한 의도적인 시어와 행배열로 가락이 힘차고 거센 격정을 느끼게 한다. 그밖에 산문시로 〈금강송가〉(여명, 1925.
6)·〈몽환병〉(조선문단, 1925. 10) 등이 있다. 그는 민족주의 일념으로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그에 대한 저항으로 살아온 시인이다.
때로는 나라를 잃은 비애를 잊어보려고 관능의 도취에 빠져들기도 했으나, 그것이 그의 본령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시집으로 〈늪의
우화〉(1969)·〈나의 침실로〉(1977)·〈석인상 石人像〉(198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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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희
이장희
李章熙
1900. 11. 9 경북 대구~1929. 11. 3 대구.
시인.
본관은 인천(仁川). 본명은 장희(樟熙). 아호는 고월(古月). 1920년대초 감상적 낭만주의에 치우쳐 있던 한국문단에 감정을 절제한 짧은 형식의 시를 발표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아버지 병학(炳學)과 어머니 박금련(朴今連) 사이에서 태어나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일본 교토중학[京都中學]을 졸업했다. 1923년 〈금성〉 제3호를 펴낼 때 동인으로 참여해 양주동·유엽·백기만 등과 알게 되었으며, 일정한 직업 없이 항상 집에 틀어박혀 고독하게 지내다가 29세 때 집에서 음독자살했다. 1924년 〈금성〉 5월호에 〈청천(靑天)의 유방(乳房)〉·〈실바람 지나간 뒤〉·〈새 한 마리〉·〈봄은 고양이로다〉 등 시 6편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그뒤 〈겨울밤〉(생장, 1925. 5)·〈연〉(신민, 1925. 10)·〈귀뚜라미〉(신민, 1929. 1)·〈봉선화〉(문예공론, 1929. 5) 등을 발표했다. 주로 쓸쓸하고 애달픈 느낌을 주는 것을 시적 대상으로 삼아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로 나타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고양이의 모습에 어린 봄의 기운을 노래한 시로서 전체 8행 4연으로 되어 있고, 〈새 한 마리〉·〈연〉에서는 새와 연을 고독과 슬픔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래했다. 독자적으로 펴낸 시집은 없고, 1951년 백기만이 펴낸 평론집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금붕어'라는 표제로 시 11편이 실려 있다. 김기림에 앞서 정지용과 함께 모더니즘 시를 썼으며, '참신한 감각적인 시', '상징적 수법으로 천재적 촉망을 받은 시인'이라고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