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나

12월

달그리매 2006. 8. 5. 18:28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

     

     

    12 /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래도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진 않았다

     

     

    강성은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

    숙명여대 불문과 휴학 중

     

    <당선소감>

     심장 없이 보낸 어느 겨울 나는 금빛 순록을 타고 눈의 거인을 찾아나섰다. 눈 덮인 계곡과 동굴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하루하루가 늘 낯선 얼음구멍이다. 아직도 눈의 거인은 보이지 않고 눈보라도 잦아들지 않지만 언젠가 눈의 거인을 만나면 세게 끌어안을 생각이다. 내 몸이 얼어붙든 그의 몸이 녹아 흘러내리든 간에.

     

     시가 가장 황홀해지는 순간은 누군가 소리내어 읽는 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읽혀지는 순간 시는 봄눈처럼 땅에 떨어져 녹아간다. 녹아지기 위해 시는 씌여진다. 아무도 내 시를 읽어주지 않던 시간이 있었다. 나하고 시하고 둘이서만 심심한 줄넘기를 했다. 시를 읽어줄 사람들이 생긴다는 사실이 기쁘고 두렵다. 두렵고 설렌다.

     

     가장 닮고 싶은 사람 내 어머니께, 가족들에게 늘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가르침을 주셨던 은사님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내 거울과도 같은 오랜 친구들, 함께 숲을 걸어들어가준 인스턴트 시인들 참 고맙다. 내 영혼을 전율시키는 음악들, 앞서 시를 쓴 죽은 자들과 오늘밤도 함께 가벼운 산책을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