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 이기철
아무도 내 위에 그 마음을 쓰지 마라
글자가 닿는 순간 나는 나를 잃고 만다
나는 색도 향도 없는 흰 몸을 지니고 싶다
색이 닿는 순간 나는 나를 벗어 던진다
아무도 그의 사랑 혹은 그리움을
내 위에 쓰지 마라
그것을 쓰는 순간 내 몸은 사랑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
꽃도 염소도 내 위에 그리지 마라
그것을 그리는 순간
내 몸은 꽃이 되고 염소가 된다
나는 나이고 싶다
나는 오로지 한 장의 종이이고 싶다
오래 깨끗하고 희고 빛나는
-현대시 2006년 8월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