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에지야

패러디, 모방, 표절

달그리매 2007. 11. 5. 03:39

패러디·모방·표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 말은 대체로 모든 창조적인 결과물이 어떤 영향 관계에서 생성되게 마련이므로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인 양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창작에 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는 관점이 아닐까 싶다.


최근 연예가에 서태지와 이재수라는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서태지의 노래를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열광적으로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만큼 세대간의 간극이 크기 때문일까. 기껏 내가 기억하는 서태지는 「난 알아요」라는 곡 말고는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국적 불명의 춤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서태지의 「컴백 홈」이라는 노래를 이재수라는 음치가수('음치'와 '가수'란 두 단어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가 자신의 스타일로 패러디하여 부른 노래 「컴배콤」이 저작권 침해, 인격권 침해의 문제가 되어 법정 공방으로까지 번졌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잠깐 패러디에 대한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패러디란 어떤 저명한 시인/작가의 시의 문체나 운율을 모방하여 그것을 풍자적으로 또는 조롱 삼아 꾸민 익살스러운 시문(詩文)을 말한다. 유명한 작품의 한 단어, 한 구절을 비틀어 바꾸거나 과장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그 본질이다. 넓은 개념으로 보면 모방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언론에서는 현직 대통령도 희화화(戱畵化)되고, 텔레비전에서는 대통령의 목소리를 흉내낸 코미디가 나오기도 한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논어(論語) 강의가 인기를 끌자 코미디언 서 아무개의 '돌 선생 강의'라는 패러디가 나온 적도 있었다. 그래도 대통령이나 도올 선생이 인격권 침해로 그들을 소송했다는 얘기는 없다. 그렇다면 서태지는 그보다 위의 어떤 신성 불가침의 존재일까.


패러디는 단순히 웃자는 데서 출발한다. 대중들이 보고 웃으면 그게 바로 패러디의 효과일 뿐이다. 영화에서도 패러디의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007 제임스 본드, 람보를 흉내낸 백발의 코미디 배우는 「못 말리는…」시리즈 영화의 단골 주역이다. 그가 「탑건」,「사랑과 영혼」,「타이타닉」 등을 혼성 모방한 영화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베토벤의 유명한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를 우리 나라에서 오래 전 김용선이 편곡한 대중가요 「정열의 꽃」이 있다. 아마 70년대일 것이다. 당시 이화여대 미대 출신의 가수 정미조가 그 노래를 불렀고, 요즘은 다시 김수희가 가사를 바꿔 부른 「정열의 꽃」을 들을 수 있다. 혹시 베토벤의 유족들이 저작권 운운하며 항의하러 오지 않을까.


음악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음률에 다른 가사를 붙이는 경우를 패러디라고 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특히 16세기에는 어떤 악곡의 선율이나 구성법을 빌어 작곡한 유사한 악곡을 패러디라 하였다. 그것은 풍자나 익살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경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경우와는 다르다. '패러디 미사곡'이라는 게 있을 정도였다.


문학에서의 패러디, 또는 모방을 생각해 본다. 패러디의 시조는 멀리 고대 그리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의 풍자시인 히포낙스가 그 패러디의 시조라 한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도 실은 중세시대 기사도 전설의 패러디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독백이 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텔레비전의 역기능이 심각히 우려되었던 미국의 1960년대에는 이것을 패러디한 "텔레비전을 보느냐 마느냐, 이것이 문제로다(TV or not TV that is the question.)."라는 말이 유행했다던가.


패러디에 대하여 언급한 이사라 시인의 말을 들어본다.

 

린다 허천(Linda Hutcheon)에 의하면 패러디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주제와 형식을 표현하는 주요한 기법이며 모방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패러디는 단순히 패러디된 작품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러닉하고 장난스러운 것에서부터 경멸적이고 조롱조인 것까지를 포함한 전도(顚倒)에 의한 모방이다. 그러나 패러디는 더 나아가 이전의 예술작품을 재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전도시킬 뿐만 아니라 초맥락화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의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협의로 볼 때는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조롱하거나 희화화' 시키는 것이지만 광의로 볼 때는 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반복과 차이를 의미한다.


패러디라는 용어는 '대응하다' 또는 '반(反)하다'의 뜻인 'para'와 노래의 뜻인 'odia'의 합성어 parodia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선행의 텍스트와 대응하거나 반한다는 데 있어서 패러디와 풍자, 패스티쉬, 상호텍스트성은 엄격한 구분이 불가능할 만큼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패러디와 패스티쉬(pastish, 긁어모은 것)는 양자 모두 모방을 뜻한다. 그렇지만 패러디가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에서 차이와 변형을 강조하는 데 비해 패스티쉬는 모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그친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은 중성 모방 또는 혼성 모방인 패스티쉬가 숨은 동기나 풍자적 충동, 웃음이 없는 공허한 패러디이며, 스타일상의 가면이고, 내부 깊이가 없는 표피적 모방이며, 여기저기 원전들을 차용하는 짜깁기라고 설명한다.
―「실험적 기법」『시창작 이론과 실제』(1998, 시와시학사)

 

널리 알려진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많은 패러디 작품을 거느리고 있다. 황지우는 "내가 꽃에게 다가가 '꽃'이라고 불러도 꽃이 되지 않았다. 플라스틱 造花였다."라고 쓴 것도 있고, 오규원의 「'꽃'의 패러디」, 장경린의 「김춘수의 꽃」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장정일의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는 기발하며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 장정일의 시 일부 인용

 

남의 창작물 중 한두 군데라도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인 양 슬쩍 훔쳐 넣는 것을 표절(剽竊)이라고 한다. 그건 모방이라 할 수가 없다. 대중가요 쪽에서 이따금 일본 노래 한두 소절을 표절했다고 말썽이 나기도 하고, 문단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곧잘 불거져 나온다. 쉽게 말하면 남의 시가·문장·학설 따위를 자기 것으로 발표하는 일이 곧 표절이다. 최근 젊은 평론가가 저명한 평론가의 글에 대하여 감히 표절 사실을 밝히고, 그 문제로 인하여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당한 해괴한 사건이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금년도 신춘문예 당선 시 가운데도 그런 의심을 받은 작품이 있어서 어느 계간지의 홈페이지 게시판이 정월 한 달 내내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H일보의 당선작이 문제의 표절 의혹을 받은 시였다. 내 개인적인 견해를 말한다면 그건 분명한 표절이라고 생각한다.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이라고 이미 지상에 발표한 이후라서 철회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 전년도 어느 잡지에 발표된 텍스트의 시와 발상이 비슷하고 영향을 받은 듯하지만 표절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궁색한 변명이 뒤따랐다. 그가 투고한 다른 시들의 수준도 충분히 고려해서 확정된 결론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감때사나운 눈총을 받은 시 말고 다른 그의 시를 당선작으로 발표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긴 그렇다면 표절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난처한 입장이 될 수도 있으리라.


이미 고인이 되어서 그의 시를 거론하는 일이 좀 마음에 꺼려지긴 하지만, 분명한 평가와 정리를 해야 마땅하리라는 뜻에서 박정만의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에 대하여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1966년에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가 그 작품이 일개 지방대학신문에 보름쯤 먼저 발표되었다는 사유로 당선이 취소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었다. 표절과는 관계없는 사안이었다. 다만 거대 신문사의 권위가 문제였다. 억울하게 낙선(?)의 고배를 든 나는 당선될 뻔한 시와 다른 시들을 묶어서 1966년 여름에 처녀시집 『이상기후』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1967년 조선일보에 당선되었다.


그 이듬해 1968년 박정만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였는데 신문에 발표된 그의 시 「겨울 속의 봄 이야기」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겨울 속의 봄 이야기

 


뒷울안에 눈이 온다.
①[죽은 그림자 머언 記憶 밖에서]
무수한 어둠을 쓸어 내리는
구원한 하늘의 說話.
나는 지금 어둠이 잘려나가는
瞬間의
②[분분한 落下 속에서]
눈뜨는 하나의 나무
눈을 뜨는 풀꽃들의
③[건강한 죽음의 蘇生을 듣는다.]
무수히 작은
아이들의 손뼉소리가 사무쳐 있는
暗黑의 깊은 땅속에서
몸살난 昆蟲들은 얼마나 앓고
있는가.
四方에 思惟의 蟲齒를 거느리고
밋밋한 樹海를 건너오는
찬란한 아침 光線.
受胎한 女子의 房門 앞에서
나는,
靑솔과 반짝이는 銅錢 몇 잎을
흔들며
자꾸만 서성대고 있다.



아침 한때 純金의 부리로
빨갛게
새들은 남은 殘雪을 쪼아대고
그때 무어라 귓속말로 읽고 가는
바람의 傳言.
수런거리며 은빛 비늘이 돋아
나는
樹皮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몇 개 새순이 자라나고 있는가.
④[사랑의 品詞들로 점점이
물들어 가는 나의 눈과 목소리]처럼
⑤[예지의 光彩가 가지 끝에 엉기어]
비쭉비쭉 푸른 血管이 일어서면,
저 유난히 커오르는 숨소리를
내 아내의 어린 살빛은 듣고 있다.
⑥[자꾸만 바람 뜨거운 나뭇가지 끝에서]
까치들은 한 小節의 노랠 부르며 있고.



⑦[홀연 도련님 눈썹 위에 내려앉는
淸雅한 뻐꾸기 울음소리.]
봄의 젖줄을 잡아당기는
따스한 母情의 觸感을 한 줄기씩 내리어
꽃대의 燈心을 밝히고 섰는
어머니의 祝福을 누가 알까.
⑧[家家戶戶의 문전마다]
⑨[新春大吉이라 榜을 붙이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옮겨 앉는 메아리.
時間은 상처 난 손을 떨어뜨리며 지나가고
⑩[겨울 冷氣는 땅강아지 발목 앞에서
바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이 시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묘한 혼성 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표절이라 생각하지만. 박정만은 경희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 때 국문과 대표인 친구가 내 절친한 동창이었고 그로부터 내 처녀시집을 받아 탐독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 시에서 많이 영향받았다는 얘기인데, '영향'과 '표절'은 엄연히 다르다. 여기 시행의 앞에 번호를 매긴 것들 아홉 군데가 말하자면 내 처녀시집 『이상기후』에 들어 있는 시들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① 죽은 사람들의 그림자/ 머언 記憶 밖에서 ―'겨울 나무'에서
② 純金의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의 분분한 落下 ―'市民들'에서
③ 뛰어다니며 예감하는/ 건강한 우리들의 죽음. ―'市民들'에서
④ 문을 두드리는/ 나의 손가락까지 점점이 물들어/ 파아란 잎사귀로 하늘대다 ―'人形'에서
⑤ 봄철의 예지/ 스미어 있음인가,/ 빗속에/ 비 젖는 나무 줄기 속에 ―'겨울 나무'에서
⑥ 미친 듯이 나부끼는 가슴 속의/ 바람 뜨거운/ 나무 ―'겨울 나무'에서
⑦ 도련님 눈썹에 눈 내리는 돌개바람/ 돌개바람 속에 북소리/ 쇠북 소리/
冥界를 길어내는 피리 소리 ―'紙燈說話'에서
⑧ 家家戶戶의 뜨락에서 ―'市民들'에서
⑨ 吉兆. 吉兆,/ 紙燈을 걸어두었던 문설주에 ―'紙燈說話'에서
(신춘대길? '입춘대길'은 들어보았지만 그런 말도 대문에 써붙인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⑩ 여름이/ 땅강아지 앞다리에서/ 바쁘게 무너져 오는 것을 본다. ―이상렬 '씨 뿌리는 마음'에서 미리 밝혀 둘 일이 있다.

 

나와 이가림은 고교 동기동창이고, 이상렬은 고교 2년 후배, 박정만은 3년 후배라는 사실이다. 이상렬, 그는 불운한 무명 시인이었다. <사상계> 신인상에 최종선까지 올랐다가 강서화(강은교)에게 밀려 떨어진 후 끝내 일어서지 못하였고, 지금 그는 고인이 된 사람이다. 신춘 당선시에 대하여 박정만은 내게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으며, 오랜 세월 뒤 갖은 고초 끝에 불행한 생을 마감하였다. 어쩌면 내게 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들에게도 빌려 쓴 구절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어야 할 시가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나는 그가 죽음을 앞두고 한꺼번에 수많은 시들을 쓴 것에 대하여서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


박정만 시인이 죽고 난 뒤 어느 잡지사가 앞장서서 그의 시비를 세우자고 하였을 때 나는 그의 사과를 끝끝내 듣지 못했으므로 냉담하였다. 나는 지금도 문제의 그 시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못한다. 그것은 표절, 아니면 교묘한 혼성 모방의 시이기 때문이다.


정녕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은 진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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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패러디, 패스티시, 키치 (퍼옴)

 

플라톤의 예술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의 역사에서 ‘모방’은 ‘창조’ 만큼이나 고달픈 과제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원텍스트 중심의 전통적 방식이 멀티텍스트화 되면서 ‘모방’은 바야흐로 다양한 방식으로 폭발하며 사회 전반의 모든 양식들을 휘두르고 있다. 그 대표적 방식은 패러디, 패스티시, 키치라고 볼 수 있는데 이번 요약문에서는 지면상 세 방식을 비교해보는 차원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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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패러디의 사전적 정의는 ‘조롱이나 코믹한 효과를 위하여 저자나 작품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모방하는 산문이나 예술작업’(The American Heritage, 2000)을 말하며 표현양식을 불문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원작의 약점이나 진지성을 목표로 흉내와 과장을 통해 왜곡시킨 후 그 결과를 알림으로써 원작이나 사회적 상황에 대해 비평과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Burr, 1996). 사전적 의미에서 알 수 있듯 패러디는 원작물을 모방하지만 원작으로부터 원작 이상의 의미를 도출시키는 유머와 비평이 있는 예술적 작업을 의미한다.

한편 패러디의 어원은 그리스어 명사 ‘Paradia'에서 유래되었다. 접두사인 ’Para'는 ‘대응하는(counter)' 혹은 ’반하는(against)'의 뜻이며 이는 텍스트 간의 대비와 대조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리스어에서 ‘para'는 ’이외에(besides)'의 뜻도 있으므로 일치와 친밀의 의미도 함께 지닌다(Hutcheon, 1985).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종합해 보면, 패러디는 이전의 것을 취함으로써 앞에서 발생한 호의적인 감정에 대한 전이현상을 발생시키기 위한 반복적 효과라는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조경섭∙김일철, 2002). 다시 말해 패러디는 원작물에 반(反)하는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원작 이외의 의미를 함의하며 원작이 가지고 있는 저명성을 기반으로 수용자에게 친밀하게 각인될 수 있는 표현방식이다. 2


패러디의 의미 3

첫째, 진보의 의미를 지니는 패러디의 특징은 바로 그 스스로의 역사성을 말한다. 패러디는 그 스스로 원본으로 회구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패러디는 그것의 대상이 되는 원본이 있다는 뜻이다. 패러디화되어 버린 예술작품은 원본을 향한 끊임없는 기억과 경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회귀의 복고的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패러디는 원본에 대하여 새로운 가치에 의미를 두고 새로운 사실을 보내기 때문에 “새롭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여기서 “새롭다”라는 말의 의미는 원본을 추월해서 진보적 방향성을 향하여 전진한다는 것이다. 패러디는 이와 같이 원본으로의 회귀성과 원본을 뛰어넘으려는 자체적 애매함과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우리는 패러독스paradox라고 하는데 패러독스란 자기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 즉 자기부정을 뜻한다. 하지만, 패러디를 패러독스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원본에 대한 회귀성의 농도가 진보의 힘보다 훨씬 덜하기 때문에 모순의 개념보다 진보의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한편, 패러디는 원래 “창조”의 의미를 지니는데, “창조”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진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아방가르드적 성향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방가르드의 커다란 축을 이루는 것은 “역사”란 것을 “진보”로 보고 있기 때문이며, 패러디 또한 역사를 진보로 보는 점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모더니즘시대의 사람들은 역사성 안에서 최종 목적 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 한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목적 없는 일직선상의 시간적 사고가 역사적 진보인가? 하는 회의를 갖게 만든다. 최근 사람들은 시간을 좀 더 먼 관점에서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것은 시간이란 원적인 성격과 직선적인 성격을 모두 갖춘 나선형의 존재를 그리게 된다. 근본적으로 패러디는 이러한 나선형의 시간 안에 근거한다. 즉, 패러디는 끊임없는 과거의 “참조”인 동시에 근본적으로 앞으로 진행하는 시간이다.

둘째, 패러디의 호환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한다.

지구상의 모든 문화들은 서로 다른 문화들을 “창조”한다. “문화”란 그것 자체가 패러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공통적인 원본을 가지고 있다. 패러디의 속성상 현재의 문화들은 끊임없는 원본에 대한 것을 상기하는 것이며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의 삶이 서로간의 의사소통에서 거의 문제가 없는 것은 바로 패러디의 기능과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동안 패러디 때문에 상호 호환성을 가지게 된다. 현대미술의 가장 큰 문제는 대중과의 대화가 단절되어있다는 것이다. 작가, 작가와 평론가들 사이에도 진정한 정보의 전달이 막혀 있다. 이것은 그동안의 미술이 적극적인 패러디를 통하여 발전 되어오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셋째, 분명히 패러디는 원본을 창조하고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따라서,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에 의하여 가치 또한 바뀌게 된다.
패러디 된 작품은 다른 시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원본의 역할을 하고 재패러디 된다. 패러디 된 작품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역사성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발생하여 미래로 성장해 나가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패러디는 그 과정성의 특징으로 인하여 하나의 완결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패러디는 끊임없이 연속적이고 시간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즉, 하나의 작품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세계 속에서 상호 텍스트적으로 연결되고, 끊임없이 “참조”되고, “참조”되어진다. 그래서 작품은 한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 시대 상황의 전 인류가 공동으로 창작하는 것이라고 한다.

넷째, 패러디의 가장 큰 특징은 “참조대상”에 대한 긍정성이다.
고로, 타자에 대한 긍정성, 역사에 대한 긍정성이야말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긍정성, 역사에 대한 긍정성은 자아에 대한 생각을 독립적이고 폐쇄되고 명확히 구별된 정체로서의 개인의 개방적이고 타인과 상호 교환적이고, 모든 존재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패스티시 4


권위주의적 모더니즘에 대응하는 개념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목적적이고 형식적이며 이성적이고 총체적 동질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적 사고를 부정하는 새로운 가치체계로 나타난다. 즉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통념상의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파격과 혁신의 수반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표현양식으로 사용되는 패러디는 모더니즘 계열의 패러디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린다 허천은 “패러디는 그 아이러닉한 초문맥성과 전도에 있어서 차이를 가진 반복이며, 패러디하는데 배경이 된 텍스트와 패러디 간에 비평적 거리가 암시되며, 이는 통상 크리에이터의 주관에 의한 아이러니에 의해 승화된다.”고 정의하였다. 즉 패러디는 반복이지만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며 비평적 아이러니의 거리를 가진 재창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광고에서 차용하는 패러디 기법은 대체로 기법의 차용일 뿐 허천이 정의한 패러디의 미덕은 상실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고는 전혀 새로운 것을 보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익숙해진 전통과 양식, 즉 과거가 되어버린 일상들을 조합하고 배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가 항상 새롭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기존의 이미지들을 다양한 층위를 갖는 방식으로 콜라주하여 일상을 새롭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콜라주는 일상의 익숙함, 진부함을 새로움으로 환기시키는 일종의 정화장치이다.

정끝별은 원텍스트의 모델이나 일반적인 부호, 그리고 그 권위를 계승하는 제1유형은 쉽게 ‘모방적 패러디’라 부르는데 이 유형은 원텍스트에 대한 공격성이나 희극성은 사라지고 원텍스트에 대한 계승을 목적으로 한다. 원텍스트의 권위와 규범을 문제시하는 제2유형은 ‘비판적 패러디’라 부를 수 있는 데, 비판적 패러디는 원텍스트의 근거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거나 비판적으로 개작함으로써 비판적 거리를 갖는 패러디이다. 원텍스트의 권위와 규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 제3유형으로 ‘혼성모방적 패러디’가 있다. 혼성모방 패러디는 가장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경우이다. 단순한 모방과 인용차원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비판적이고 우연성에 의한 콜라주의 특성과 같이 표현에 있어 표면적이고 주체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페스티시와 유사할 수도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던예술을 인식주체가 소멸된 후기 산업사회의 문화논리로 규정하고 그 특징으로 비판적 거리의 소멸, 역사적 부재, 행복감의 만연 등을 들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체와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이미지화하여 재현할 수 없는 세상을 반영하는 소비사회의 문화논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임슨은 비판적 거리가 소멸된 포스트모던 기법을 페스티시라 구별지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패러디는 제 역할을 상실한다. 패러디는 사라지고 패스티시라는 저 이상스런 새물건이 서서히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패스티시란 패러디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별한 가면의 모방이며 죽은 언어로 된 말이다. 그러나 패스티시는 그러한 흉내내기를 중성적으로 수행하여 패러디가 가진 궁극적 동기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고, 풍자적인 충동이 제거되고, 웃음이 결여되어 있으며, 비정상적 언어활동 속에도 아직 어떤 건강하고 정상적인 언어형태가 남아있다고 하는 확신이 없다. 패스티시는 이리하여 공허한 패러디, 눈동자 없는 동상이다.”

제임슨의 패스티시 개념은 과거의 것을 그저 차용하거나 혹은 무분별하게 뒤섞는 것을 뜻하고, 그런 차용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만이 있을 뿐 비판성이나 정치성이 없다. 우리 광고에서 흔히 보이던 복고풍의 패러디도 대부분 과거의 기억이나 사진첩에서 나온 듯한 이미지들의 합성, 조합이다.

패러디와 패스티시 논쟁은 주로 문학을 둘러싸고 패스티시의 부정적 면모를 부각시켜왔다. “패러디가 기존의 어떤 텍스트를 흉내내기의 방식으로 비틀어 비판적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법인 반면 비판이나 풍자의 의도를 닮지 않은 비의도적 패러디로서의 혼성모방은 기존 텍스트의 순수한 반사, 비판성을 갖지 않는 순수한 흉내내기, 순수한 복사와 복제의 기법이다. 그런 점에서 혼성모방은 전통적 의미의 모방이나 인용, 차용, 인유가 아닌 순수한 복사”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키치 5


키치의 어원

키치라는 용어의 어원적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키치라는 용어가 영어의 스케치에서 유래했다는 설은(김소연, 1994) 1860-70년대 독일 뮌헨의 화가와 화상들이 팔던 값싼 그림과 조각상들의 주요 구매자이던 영국계 미국인들이 이것을 스케치라고 부른 것이 독일식으로 변형을 겪으면서 키치가 되었다는 것이다(Dorfles, 1969). 그 외에 설득력을 갖는 것은 진흙을 가지고 손으로 문대며 놀다 라는 독일어 동사 키켄(Kitshcen)에서 유래했다는 설인데(Solomon, 1991) 더럽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어 키치의 부도덕성에 대한 암시가 보인다(김소연, 1994). 또한 값싸게 만들다 라는 메클렌부르크의 방언 버키친(verkitschen)에서 유래했다(Moles, 1995)는 설이 있는데 이 동사는 은밀히 불량품을 속여 사게 한다는 의미도 있어 키치의 어원에 이미 윤리적인 평가가 들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어원적 유래로부터 키치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부정적 의미를 느낄 수 있다.(오창섭, 1997)


키치의 발생 배경

키치적 사물과 이에 대한 태도의 발생은 서구 자본주의 시민사회가 풍요로워지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Moles(1994)는 키치의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눈부시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 두 시기를 제시하였는데 첫 번째 시기인 부르조아 사회의 부흥기는 오늘날 우리의 생활양식의 기반을 만들어낸 사회라고 할 수 있고 두 번째 시기는 우리가 살고있는 소비사회로 사물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네오 키치의 시기이다.

19세기 말까지의 미적 감수성의 향유와 계발 기회는 일부 특수 계층인 귀족계급에만 제공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가속화된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하류 계층들은 새로운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공장에서 만들어 낸 산업 제품을 소비하는 도시생활에 젖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여분의 수입을 얻기 시작하였을 때 마침내 중류계층으로 상승하는 사회적 지위 이동 현상이 일어났으며 이와 함께 중 하류 계층의 사람들은 부자와 귀족들이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표시하기 위해 순수미술을 사용하는 방식과 모습을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키치를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키치는 상류 계층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McDonald, 1957). 네오 키치의 시대인 소비사회는 소비를 위해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이자 생산을 위한 창조의 당위성이 주장되는 사회로 창조, 생산, 소비의 순환이 점점 빠른 속도로 반복되는 사회이다.(Moles, 1995) 소비사회에 근거하고 있는 현대는 소비라는 가치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 소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자기 표현의 수단이자 차이표시 기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키치적 성격을 드러낸다(오창섭, 1997).

다시 말해 키치의 발생은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야기된 사회 문화적 변화를 기반으로 하면서 19세기에 이미 널리 일반화된 현상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소외감과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에 근거하여 거의 모든 시대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문화를 관통하는 현상이었으며 키치가 미적 논의 대상으로 사회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인간의 생활에 다가온 것은 대중적인 소비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였다(김경옥, 1998).


키치의 개념

사전에서는 키치를 고급문화의 미적 기준을 부적절하게 모방한 대량생산된 예술이나 사물을 의미하는 용어, 혹은 통속적이고 저속하고 값싸고 나쁜 취향으로서 쉬크와 대립되는 개념의 사물이나 이미지의 총칭(The Random House, 1988)으로 정의하고 있다.

키치는 애초부터 윤리적으로 부정함이라든지 진품이 아니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며(Moles, 1995). 참된 문화의 가치에는 무감각하면서도 특정한 문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오락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겨난 대용문화이다(Greenberg, 1987). 키치는 허위의 미적 형식으로 키치 개념은 모방이나 위조 혹은 자기기만을 의미하며 키치는 또한 사이비 예술이며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는 예술로서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묘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어원을 갖는 키치는 키치적 표현이 범람하고 있는 현대에 이르면 그 개념이 대중문화의 특성과 관련되면서 보다 풍부해지고 다양해진다. 키치를 긍정적인 의미로 보는 입장에서는 키치현상을 산업사회의 소비문화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삶의 태도를 표현하는 특정 철학적 미학적 범주라는 광범위한 영역에 속한 개념으로 보고 무엇이 저속하고 아닌지는 이를 구별하는 특정 관념 또는 미적 감수성의 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에 키치의 이해는 취향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본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념의 다양성과 평가의 이중성은 키치 개념을 보다 모호하고 복잡한 개념으로 파악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어왔다.

오늘날 키치는 대중들의 실제 삶을 반영한다. 따라서 키치 현상들은 나쁜 취미의 대상들의 소비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이 사물들로 향하는 의도, 사람들이 그 속에서 추구하는 정서, 사람들이 만족해하는 요구를 포함하므로 키치 분석은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즉, 키치적 대상은 키치적 대상으로 되게 하는 키치적 태도에 의해 규정되며 이러한 키치적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을 키치적 인간이라고 한다. 대체로 키치인간은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이며 분석이 아닌 조화와 종합을 선호하는 사람으로, 예술이 유쾌하고 달콤한 느낌들만을 산출해야한다고 믿으면서 노력 없이 향유하는 사람으로, 미적대상을 지위상징의 수단으로서 취하는 사람으로 이해된다(김소연, 1994). 대다수의 현대인은 키치인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분석하려고 하는 키치적 미의식과 키치적 태도의 특징들은 특수한 별종의 인간들만이 갖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광범위하게 일반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키치의 개념이 이처럼 키치적 주체의 태도로 정의된다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키치 인간은 키치가 아닌 작품이나 상황조차도 키치로 경험하려하기 때문이다.


키치와 예술

전통적으로 키치는 예술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왔으며 거의 대부분 부정과 시각과 질타로 일관해온 것이 사실이다. 문화예술 비평가들에게도 키치는 참된 문화의 가치를 낮추고 천박한 복제품을 위해 재료들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위조된 거짓감각의 저속한 대중의 취향에 지나지 않는 의미로 비쳐져왔다. 예술이 무관심적인 거리를 전제하는 초월적인 것이라면 키치는 자기 향수적 감상으로, 예술이 전위라면 키치는 후위로, 예술이 선 혹은 진실을 추구하는 열린 세계라면 키치는 악 혹은 허위를 추구하는 모방세계로 파악하고 있다. 예술은 진리이고 키치는 허위이며 예술향수가 미적 거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키치향수는 미적 거리 두기를 배제하며 예술이 초월적인 것이라면 키치는 사이비 초월적이며 예술이 자율적이라면 키치는 타율적이고 예술이 창조적이라면 키치는 상투적이고 예술이 선하다면 키치는 약하다. 한마디로 키치와 예술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묶여져 있으며, 예술은 긍정적인 가치를 키치는 부정적인 가치를 담보하는 미적 산물이라는 것이 일반화된 통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에 도전적인 입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키치라는 기준은 형태와 미적 우월성의 결핍에 근거하지 않고 특별히 자극적인 정서적 내용의 존재에 근거하는 것인데 키치가 예술이나 인간의 정서와 관계한다는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 따라서 어느 한쪽만이 감성적(감정적)이라고 비난받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처음에는 키치가 예술을 베끼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그 이후의 키치와 예술의 관계는 단순히 원본의 일방적인 우위로 설명할 수는 없는 양태로 진행된다. 예술의 영역이 점차 축소되어 일상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리고 키치가 기술 및 산업과 미디어의 발전으로 고도화되고 그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예술과 키치의 경계선 자체가 모호해지며 또 이 둘 사이가 가까워져 경계가 흐려지게 되었다.

산업사회가 발전하는 곳에서 키치는 번성한다. 때로는 조악한 싸구려 복제품으로, 때로는 멋드러진 값비싼 장식품으로, 때로는 그러한 자기자신을 아이러니컬하게 착용한 예술품으로 키치는 세계 만방에서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대의 키치인간들은 키치의 조잡한 이미지들 속에서 오히려 친근하고 대중적이다 못해 향수 내지는 연민을 느끼고 있다. 키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피에서 오는 쾌감과 진부한 것(키치적인 것)을 통해 새로움을 체험하는 긍정적 효과를 제공해주며 키치패션은 자유로운 형태와 감정의 표출로 긍정적이며 가치있는 것으로 적극 수용되고 있다. 또한 키치인간들은 패션상품 소비를 통해서 현실의 진지한 생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자신의 결여를 대리만족으로 채우며 특정 집단의 소속을 나타내거나 남과 다른 나를 정의하고자 하며 기능적 이점보다는 즐거움, 아름다움, 행복감, 놀라움 등의 심리적 이점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키치적 표현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구체적인 도움이 되면서 삶을 다양하고 활기있게 만들어주기보다 하나의 정보오락 메이커로서의 작용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현대산업사회의 비인간화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체념적 형태의 것이라면 전통적 규범을 파기하는 이러한 현상들은 낭비 내지 소모적인 형태 이상의 것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키치적 표현은 주관적 표현이라는 예술의 개념을 차용한 나르시즘적인 자기위안과 과시 속에서 우리를 바람직하지 않은 현실로 유도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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