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에지야

한 독신녀의 슬픈 마지막 시

달그리매 2006. 7. 22. 10:24

  

 

한 독신녀의 슬픈 마지막 시 

여성 시인 중 가장 새된 울음으로 기억되는 고정희.

마흔세 살로 타계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정말 일찍 죽은 사람들은 늙지 않은 채,

그저 살아 있는 사람들만 늙나 봅니다.

고정희는 1948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에서

5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고정애이고, 지금 살아 있다면

50대 중반, 그러니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거지요.

열아홉 살 때 <새농민>에 발표된 고정희의 시는

시인 장만영의 호평을 받았으며,

스물일곱 살 때 박남수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시단에 나왔습니다.

<새전남> 기자 생활도 했고 <또 하나의 문화> 창간동인이며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편집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했습니다.

1990년에는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아시아 종교음악연구소 초청으로

'탈식민지 시와 음악 워크솝'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다가,

그 이듬해 지리산 등정 중 뱀사골에서 폭우 속에

실족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뒤로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자신의 시신을 염하시는 어미니를 보고 있는

유고시 <독신자> 후반부입니다.
딸이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독신자의 죽음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안타깝습니다.

붙잡을래야 붙잡을 수 없는 인연이며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유난히 얼굴이 슬퍼 보이는 고정희는

환절기 때 옷장을 정리하다가 문득 저만치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한 후배 시인에 의해 발견된 유고시
<독신자>는

시인이 떠난 지 8일 뒤에 <일간스포츠>에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라 해서

세인들의 놀라움을 샀지요.

후배 시인의 말에 따르면,

고정희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이 시가 정서되어

책상 한가운데 반듯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이 시를 써서 책상 위에 놓고

지리산에 갔다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저는 아마도 그녀가 방을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 이 유고시를 책상 한가운데

가지런히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을 나서서 지리산으로 향했을 테지요.

거리는 조용했고, 왠지 슬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떠나기 전 시인은

남쪽에 비가 많이 온다는 뉴스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신자>의 3연

 "그러므로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모든 영혼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은 것,/ 풀도 이슬도 우주로 돌아가, 돌아가"는

한 아무개라는 사람을 생각한 구절이고,

4연에 나와 있는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어라"는

강아무개를 생각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5연

 "잊어야 할까봐/ 나는 너를 잊어야 할까봐/ 아무리 붙잡아도 소
용 없으니까"는 노 아무개라는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 그 뒤에는 김이라는 성이 나옵니다.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은 이 네 사람은 한씨,

강씨, 노씨, 김씨, 이렇게 성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유고시집을 펴낼 때

꼭 이 성들이 필요했는지 의문스럽긴 하지만,

당시 편집진은 원고를 그대로 살리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2연의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고 한 그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또 하나의 문화>의 동인인 조옥라는

고정희의 유고시집 발문에서 "그의 이상 세계는 강 같은

평화의 세계였으며 괴로움의 장작불을 영혼의 횃불로 바꾸는

곳이어서 샘솟는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러나 지리산 폭우 속에 휩쓸려가고 말았습니다.

제 기억에 고정희는 

독신으로 살면서도 항상 밝고 강하고 깨끗했습니다.

가끔 찾아오면 고정희는 저를 동생이라고 불렀고

저에게 고정희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저 남도의 해남,

그곳의 누님 같은 분이었습니다.

"시집 제목이 하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입니까.

시집 제목을 바꿉시다" 라고 했지만

시인은 마다하고 "그냥 그렇게 달아줘.

내 생각이 그래" 했던 기억이 어제 같습니다.

우리 모두 먼저 간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겠지만

어떻게 사람들이 죽을 수 있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정말 죽게 되겠지요.

"외경 읽기"의 연작시 중 하나이며

유고시집의 표제작인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의 일부분입니다.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도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고정희의 시비는

그녀의 고향 남도 끝 황토 해남에 세워졌습니다.


-고형렬의 시로 읽는 인생 시 속에 꽃이 피었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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