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에지야

나이 오십에 죽음같은 사랑에 빠지다

달그리매 2006. 7. 23. 18:02

나이 오십에 죽음같은 사랑에 빠지다

 

  박범신 새 장편욕망과 구원의 서사시 '주름' 

 

소설가 박범신(60)씨가 ‘침묵의 집’이란 장편소설을 펴낸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일간지에 연재했던 소설로 무려 200자 원고지 2600장에 이르는 긴 작품이었다. 성실하게 살아왔던 한 중년 사내가 욕망의 끝까지 걸어간 치열한 기록이었다. 그 소설로 자신의 삶에 깃들인 욕망이라는 바이러스를 어느 정도 잠재웠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는 이후 ‘흰 소가 끄는 수레’ 같은 소설을 쓰면서 차분한 명상으로 빠져드는가 싶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잠복해 있었다. 그는 아직 시간의 주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000장을 지우고 다시 썼다. 제목도 ‘주름’(랜덤하우스중앙)으로 바꿨다. 이순에 이르러 그 욕망의 기록을 다시 들추어 명징한 서사시로 복원해놓은 그는, 총총히 티베트의 설산 카일라스로 떠났다. 카일라스는 ‘수미산’의 다른 이름이다.

‘주름’은 시간의 응집된 무늬다. 시간이 응집되면 세월이 된다. 누구도 세월에 저항할 수 없다. 한 사내가 50대에 이르러 어느 날 문득 ‘인생의 본문을 다 써버린 듯한’ 허탈감에 사로잡힌다. 그 사내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기업체의 자금담당 이사였다. 그보다 더 나이는 많지만, 뜨겁고 깊은 ‘보랏빛 우물’을 간직한 여자 천예린이라는 시인이 사내 앞에 나타난다. 사내는 그 여인을 만나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온 일상을 파기한다. 사내는 죽음보다 깊은 보랏빛 우물에 투신했다.

“50여 년 간 굳세게 내 자아를 억압해온 온갖 사슬들이 일제히 끊어져 내리는 장쾌한 소리들이 나의 내부에서 쾅쾅 울리고 있는 걸 나는 들었다. 그녀의 보랏빛 우물은 깊었지만 해방된 내 자아에 끌려 나와 천지간으로 역류되었다.”(147쪽)

그는 “구조화된 세상에서 끝없이 튕겨나가 마침내 모진 광야의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 하지만 천예린은 이미 죽음 예정일을 받아놓은 병자였고, 그 사실은 그 남자 ‘김영진’만 몰랐다. 세상의 마지막에 놓인 것처럼 서로를 탐닉했지만, 천예린은 가정과 직장으로부터 궁지에 몰린 김영진을 남겨놓은 채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천예린에게는 예정된 행로였다. 그 여자는 이미 이렇게 경고했었다.

“사랑은 성찬이므로 무릎 꿇고 받아야 한다는 둥 하는 말은 속임수가 틀림없어. 우리가 무릎 꿇을 때 사랑은 우리에게 죗값을 요구하거든. 우리의 목숨을.”(153쪽)

천예린을 찾아 김영진은 나이로비로 카사블랑카로 탕헤르로, 북해까지 간다. 김영진은 “따뜻하고 광채 어린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북진을 거듭, 더욱 춥고 더욱 황량한 곳으로 이행해가는 이 부자연스러운 여로의 의미는 무엇인가”(276쪽) 자문한다. 결국 해후한 그들은 더 이상 욕망의 포로는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기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충만한 ‘중심’에 놓여 있었다. 바이칼 호숫가 통나무집에서 시베리아 바람소리를 들으며 죽어간 천예린은 “아무런 문화도 깃들어 있지 않은 석회석 같은 멍청한 눈빛”으로 돌아간 남자를 구원했다. 비록 소설 말미에 작가는 그 중심이 텅 비어 있었다고 강조하지만, 텅 빈 중심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신이 아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마지막 특권 아닌가.

1000장이나 덜어냈다고는 하지만 이 소설은 478쪽에 이르는 여전히 만만한 분량은 아니다. 그렇지만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흘러가는 시 같은 문장들로 가득한 이 책을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시 히말라야로 떠난 박범신은 책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시간의 주름살이 우리의 실존을 어떻게 감금해 가는지 진술했고, 그것에 속절없이 훼손당하면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반역하다 처형된 한 존재의 역동적인 내면풍경을 가차 없이 기록했다. 책을 내면서 나는 이제 이 ‘주름’의 잔인한 시간으로부터 정말 떠나려고 한다.”

조용호 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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