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나

바코드

달그리매 2006. 8. 3. 10:59
바코드 / 허영숙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A4 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써라 하니
웃음이 나온다
마흔 해의 이력을
A4 용지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책상 한 쪽 구석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먹다만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 줄에 기록된 것은
새우의 함량이라든가 출고 일자 혹은
숫자로 드러나는 가격에 불과할 뿐
비닐봉지 안에 갇힌
공기의 질량이나 내게 오기까지의 경로를
기록할 수 없다
어느 겨울 날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한 줄의 좁은 칸에
다 적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나간 나를
이 작은 칸 안에 모두 말 할 수는 없다
길 위에서 버려진 신발이 몇 켤레였는지
밟아온 길을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걸렸던 푸른 날의 한 때를
세로로 긋다가 올려다 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찍고 간다

― 2006년 봄《시안》신인상 당선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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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1965년 경북 포항 출생. 부산여자대학 졸업. 부산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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