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나

담쟁이덩굴의 독법

달그리매 2007. 8. 8. 15:22

 

담쟁이덩굴의 독법/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보겠다고

지문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은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 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은 듯 가시는 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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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쟁이덩굴에게 붉은 벽돌담장은 커다란 책이다. 점자를 읽는 맹인처럼 지문이 다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를 못한다. 매번 초심으로 돌아간다. 그의 읽기는 세상을 등진 채로 계속 된다.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세상은 점점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이 대목에서 시의 화자가 불쑥 '내가 그랬듯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담쟁이덩굴과 나는 일체를 이룬다. 완독의 길은 멀다. 푸른 손끝이 피엉들고 스들어 버리게 되면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서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듬해 봄에는 지붕까지 독파해 볼 요량이다.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지만 자신을 다잡고 있다. 사람살이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힘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늘의 도움은 필요하게 마련이다. 목표를 향하여 줄기차게 노력하되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함을 이 시편은 일러주고 있다. -<<시여 꽃을 뱉어라/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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