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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③ [중앙일보]

달그리매 2007. 8. 10. 01:36
미당 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③ [중앙일보]


구순 노모 향한 예순 아들의 안쓰러운 노래
한결 촉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들려줘


“작년엔 선친 얘기가 자주 보이더니 이번엔 모친 얘기가 많네요.”

“허허허…, 그렇지. 일이 좀 있었네.”
 
“일… 이라면?”
 
“글쎄, 그걸 알려줘야 자네도 기사를 쓸 수 있겠네만, 집안 일이라서….”
 
“해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난 그저 부끄러울 뿐이네.”
 
올해도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해마다 미당문학상 최종심에 올랐던 김명인 시인은 올해도 “부끄럽다”며 정중히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래도 성과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시인은 어머니 얘기를 슬쩍 비쳤다. 그것으로 족하다. 올 한 해 김명인의 시편은 어머니를 향해 놓여져 있다.

시인은 지난해 7월부터 올 6월까지 모두 22편의 시를 발표했다. 이 중에서 어머니가 직접 등장하는 시편이 여섯 수다. 지난해 회갑을 맞아 내놓은 첫 산문집 『소금 바다로 가다』에서 시인은 “시력(詩歷) 30여 년 동안 어머니를 두고 쓴 시가 몇 편 있다”고 적었다. 그 몇 편이 1년 만에 십수 편으로 늘어났다.

시인이 이른 “집안일”은 여섯 편의 ‘어머니 시’에서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시편에 미뤄 보건대, 당신의 건강이 부쩍 안 좋아지신 게다. 요즘의 당신은 덜컥, 정신을 내려놓거나 하시는 모양이다.

‘이을 듯 끊을 듯 되살아난 어머니의 기억이 불쑥/말씀하신다, 대추나무 밑에 세워둔 도끼 어딨노?’(‘도끼자루’부분)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구순 노모를/예순 아들이 안고 목욕시켜드린다/…/다라이 속에 뜬 구름 겨우 한 조각인데/고무튜브인 양 그걸 붙잡고 엄마, 엄마’(‘다라이 타고 나르는 구름’부분)

시인은 구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십여 년 전 타계한 선친은 “고기잡이는 고사하고 농사일도 못 해서 반평생을 무위도식한 가장”(앞의 책)이었다. 열 남매의 생계는 오롯이 어머니가 감당했다. 그 어머니가 이제 또 어디론가 날아갈 채비를 하고 계시다. 하여 아들은 묵묵히 준비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 작품에서 죽음이 연상되는 시편이 여럿 눈에 띈다. 여태의 김명인 시에서 죽음의 이미지가 두드러졌던 것 또한 사실이지만 이번엔 느낌이 다르다. 올해 그의 시편엔 유독 “물기가 많아졌다”(김춘식 예심위원).

서른다섯 해 시를 쓰면서 틈 따위는 좀체 안 보였던 시인이다. 하나 이제는 예전의 뻑뻑한 느낌이 아니다. 지난해 선친의 기억을 길어올린 몇 편의 시에서도 시인은 예의 팽팽했던 명주실을 슬쩍 풀어놓은 인상이었다. 느슨해졌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들 앞으로 걸어나온 것 같아 반갑다는 얘기다.


손민호 기자


지워진 80년대에 대한 기억과 사람들
예심위원 전원이 추천한 ‘묵직한’ 작품


김연수는 올해 황순원문학상 예심에서 유일하게 심사위원 전원 추천을 받았다. 최근 몇 년간 유력 후보로 거론되다 막판에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올해 후보작 ‘달로 간 코미디언’이 원고지 200장 분량의 중편으로, 최종심 후보작 중에서 가장 두껍기 때문은 더욱 아니었다. ‘달로 간 코미디언’은 “작가 김연수를 구성하는 온갖 모티프와 테마가 한꺼번에 집중된 작품”(신수정 예심위원)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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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김연수를 구성하는 모티프와 테마’라고 적었다. 그건 주제로 볼 때 역사와 허구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가리키고, 인간과 인간 나아가 시대와 시대 사이의 소통에 관한 진지한 탐색을 의미한다. 소설 구조로 본다면 큰 이야기 안에 작은 이야기를 집어넣는 방식이고, 시점으로 말하자면 3인칭이 연상되는 1인칭이다. 부지런한 독서로 건진 현란한 상식과 꼼꼼한 취재로 얻은 생생한 묘사 역시 김연수를 구성하는 필요조건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 연애 얘기다. 연애담과 상관없어 보이는 소설에서도 김연수는 꼭 연애 얘기로 시작한다. 그것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가 떠나거나 휑하니 죽거나 하면서. 김연수 소설에는 늘, 태초에 상처가 있다.

다른 점도 있다. 김연수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80년대를 발언한다. 김연수는 널리 알려진 대로 ‘91년 5월의 작가’다. 대학 신입생이 시위 도중 숨진 뒤 이어졌던 죽음의 나날들. 김연수는 그때의 기억을 여러 전작(前作)에서 수시로 호출했다. 그런데 80년대라니. 작가의 설명이 필요했다.

“저 같은 사람이 80년대를 쓰지 않으면 80년대는 화석과 같은 시대가 된다고 생각해요. 80년대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삶은 관통해왔는데 지금의 우리는 그때를 자꾸 다른 시대처럼 여기고 있잖아요. 80년대를 살았던 사람과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서 소통이 가능할까, 궁금했어요.”

김연수에 따르면 82년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의 사건은 우리의 기억보다 훨씬 비참했다. 남한의 배고픈 권투선수는 목숨을 바쳐 싸웠지만, 사실 그 시합은 카지노 고객을 위한 잠깐의 여흥일 뿐이었다. 김득구는 진작에 쓰러졌어야 했다. 권투 관객은 재빨리 카지노 고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순진한 남한의 청년은 거기까지 알지 못했다. 이 참혹한 상황을 김연수는 ‘돌고래 쇼처럼 시작된 경기는 점차 악몽으로 바뀌고 있었다’고 적었다.

하나 소설이 진정 말하려는 바는 따로 있다. 소설은 시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를 묻고 있다. ‘나’가 두 눈 질끈 감고 걷다가 가로수와 부딪치는 일이나 라디오 PD 안미선의 편집 작업, 쓰러지고 자빠지는 안복남의 슬랩스틱 코미디 모두, 자명한 것에 의해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 그러니까 지워진 것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렇게 잊힌 기억의 세계를 오롯이 복원했을 때 비로소 소설 결말, 광활한 사막에 떠오른 만월(滿月)을 마주볼 수 있다.

소설은 묵직하다. 비단 부피만 이른 말은 아니다.


손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