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에지야

나의 등단작을 말한다

달그리매 2007. 9. 5. 12:55

「돌」을 쓸 무렵의 이야기 - 나의 등단작을 말한다.(시사사 9,10월 원고)

 

 
                           손진은

노당리 뒷산
홍수 넘쳐 물살 거친 계곡 밑으로
쪼그만 돌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노당리의 산과 들
지난 수십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고도
동으로 혹은 서으로 머릴 누이고
낯익은 백양나무 강아지풀 개구리울음 뒤로 한 채
이 마을 사람들 대처로 대처로 나가듯
물살의 힘 어쩌지 못하고 떠내려간다
떠내려 가서
형산강 하구나 안강쪽 너른 벌판
낯선 땅에서 발붙이며
지푸라기들과 다른 돌들과 섞여 부대끼거나
길이 막히면
굽이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비를 그거나
구름자락 끌어덮으며 길들여지다가
비가 오면 또 떠밀려 갈 것이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냥 안주하기도 하는 돌들의 행려(行旅)여
몇몇 친숙한 식구가 떠난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더 깊은 시름에 잠기고
세찬 여름비의 며칠이 지나고 햇빛 쨍쨍한 날
가슴에 이끼 날개 달고
밤 속으로 은빛 공간 열며
별이 되는 꿈을 꾸는
조약돌 몇이 얼핏 보인다

 

  고향 마을 뒷산 계곡 밑으로 떠내려가는 '돌' 이야기를 쓴 지 벌써 이십 년이나 흘렀는가.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기간 동안 나는 뭐 하고 살았는가. 아, 하고 한번 한숨을 내쉬어 본다. 노당2리, 옛날에 풀못이 있는 제방이 있어 '풀못안'(草堤)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가구 수가 일백 호가 좀 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입향조인 영월 신씨가 이백 오십여 년 전에 이 마을에 터를 잡고, 그 뒤를 창령 조씨가 들어오고 타성받이가 뒤섞여 들어와서 부락을 이루었던 곳. 마을 뒷편엔 창령 조씨 재실과 제법 둥그런 봉우리를 자랑하는 시조 조계룡의 묘, 그리고 이괄의 난을 평정한 2등 공신인 조상을 기념하기 위한 영월신씨 종가 소유의 사당이 있다. 나 역시 월성 손씨 안락당파의 종가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성들도 그랬지만 특히 창령 조씨들의 기제사가 있는 날이면 마을은 수십대의 버스를 타고 각지로부터 온 제관들로 북적거렸고, 마을 앞 큰길까지 도로가 마비되기도 했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염치를 지키고 사는 마을이었다. 한번은 마을의 이장과 과부가 눈이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과부의 시어머니에게 발각되자 당사자들인 두 가족은 그 이튿날로 당장 짐을 싸고 마을을 떠나야 했다. 어린 시절의 필자 또래들은 서당공부의 흔적이란 것이 어설프게 남아 천자문을 옆구리에 끼기도 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마을에는 춘궁기를 보내야 하는 가난한 이웃들도 상당수 있어서 어느 성이랄 것도 없이 내 또래 아이들 중 일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일치감치 공장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마을 어린이들의 꿈은 산에서 영글어갔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대부분의 집에서는 눈망울이 이쁜 소라는 가축을 키우고 있어서, 여름에서 가을까지의 한 두 철은 소가 산에서 풀을 뜯는 기간이다. 하여 오후 두 세시가 되면 아동들은 소에게 풀을 먹이러 산을 오른다. 소들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 어둑살이 내릴 때까지 풀을 뜯어먹고 아이들은 또 아이들 나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사내아이들의 놀이란 게 빤하지 않은가. 땟국이 누렇게 흐르는 저수지에서 몇 시간이고 멱을 감거나 온 산야를 막 뛰어다니다가 뒹굴다가, 칼싸움을 하다가, 때로는 남의 밭의 감자나 밀을 뽑아 구워먹다가 그렇게들 몇 계절들을 보낸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들면 그 짓도 시들해져서 산 위에서 먼 강과 들판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 속에다가 자신의 장래를 섞어보기도 한다. 아이들의 눈이 머무는 곳에는 평야가 자그마치 50리 길도 넘을 만큼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그 사이에 안강읍이며 기계면, 멀리로는 포항 같은 도시들이 가물거린다. 그 옆구리를 질러 흐르는 형산강과 수로, 논들에 비치는 햇무리들은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더 부채질하곤 했다. 어린것들은 저 큰 평지에서 자장면 배달부 혹은 점빵의 종업원이 되어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는 어린이다운 꿈에서부터 시작하여 온갖 꿈의 무늬를 가슴에 수놓고들 했다. 어떻게 해서 그 친구들이 나중에 대처로 나가게 될 줄은 물론 까맣게 모르고 있으면서.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눈길을 끈 것은 산사태라고 하는 것이다. 홍수가 지고 나면 밭들과도 인접한 평지와 가까웠던 낮은 산들에 엄청난 골들이 파이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산사태를 직접 그 앞에서 보았다. 덤프 트럭이 모래를 쏟아붓듯 흙더버기는 둘둘 말려 내려앉고 박혀 있던 돌들은 속수무책으로 뽑혀져 떠내려간다. 그 골들은 마침내 양쪽의 거리가 사오 미터가 넘게 파여 어린 눈에는 당시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었던 찰슨 브론손이 주연으로 나왔던 서부영화에서나 봤음직한 계곡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건너지 못할 계곡의 꼭대기에서 무서움도 모른 채 산사태가 지고 돌들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구경꾼이었지만, 돌들의 모습에는 어린 눈에도 시큰거리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수십 년씩이나 그 자리에 박혀 있는 돌들이 세찬 물살의 힘을 어쩌지 못하고 머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물살은 그 돌들을 뒤지러 땅 밑으로 파고들었을까, 아니면 그냥 껴안고 뒹굴고라도 싶었을까. 그런 돌들을 보내는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계곡과 도랑 가 반쯤 뿌리가 뽑혀져 나간 백양나무와 강아지풀들의 숙여진 고개를 보는 일들은, 그곳에서 수십 바지게로도 담을 수 없을 만치 흩뿌려 내 귀에 고랑을 이루던 개구리울음은 또 얼마나 처연했던가. 그렇게 파인 협곡들은 해마다 사방공사라 하여 나무를 심고 하는 일로 메워졌지만 해마다 그렇게 터지는 산사태와 계곡의 떠내려가는 돌들은 고향의 풍경으로 가슴 안쪽에 깊이 자리잡는 것이었다.
  7, 80년대를 거치는 동안 마을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경운기와 트랙터를 가진 집이 늘어났고, 소들은 농삿일보다 살찌기 위해 존재했고, 젖소를 키우는 집들도 있었다. 영농정책의 실패인지 흉년 때문인지 특용작물에 손을 댄 사람들이 하나둘 빚을 졌다. 갑자가 달라진 세파에 마을 사람들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어떤 이는 농약을 먹고 죽었다느니, 빚에 몰린 어떤 이는 야반도주했다느니, 날이 새기가 무섭게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빈집들이 늘어났다. 마을 인심도 예전만 못 했다. 세도가 대단했던, 종까지 거느리던 물봉댁이 완전히 몰락했다.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는 물봉어른이 아니던가. 세파 앞에 마을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학천댁이 그랬고 관오댁이 그랬다. 열 대여섯 집이 졸지에 그렇게 떠나게 되었다. 그들이 누구던가. 최소한 3, 4대에 걸쳐서 이 마을에 살던 분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순박하게 농사밖에 지을 줄 모르는 농투사니다. 대처로 나간다지만, 특별한 기약이 있는 게 아니었다. 포항이고 대구, 부산 어느 이름도 알 수 없는 곳의 변두리로 거처를 옮긴다 한들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떠나는 이들 못지 않게 일가를 이루던 남아 있는 사람들의 염려도 커서 그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곤두세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오지 않았고, 간혹 들려오는 이야기는 또 어디서 어디로 살길을 찾아 다시 떠났다는 이야기가 고작이었다. 명절 때 한번씩 잘 차려입고 나타난 내 친구들은 어설픈 도시물에 발랑 까져 있기까지 했다. 그들도 다 어린 날 산봉우리에서 먼 평지와 대처를 바라보며 그곳을 떠날 꿈을 키우던 족속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발로 간 것이 아니라 세파에 밀려 그렇게 억지로 정착했다가 떠돌아다니는 도시 껍데기가  되어 있었다. 도시의 풍물과 유행을 자랑하면 할수록 그들과의 조우는 더 어색해질 뿐이었다.
  시를 쓰게 되면서 내가 최초로 조우했던 장면이 내 가슴에 울혈처럼 맺힌 그 문제를 뚫고 나가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최소한 놓여나고 싶었다. 뒷산과 저수지를 혼자서 걷는 날이 많아졌다. 학천댁의 경호가 생각났고, 원구댁의 창수가 떠올랐다. 미쳐버린 남익이 형도 고등학교 때 자취를 같이했던 우각댁의 근재도 스쳐 지나갔다. 고추가 빠져나간 대궁이가 비닐조각을 감고 있었고, 한번씩 저수지 물주름 앞 솔밭 사이로 꿩이 날고 있었다. 쩡쩡거리며 따라오는 얼어붙은 저수지를, 성에를 하얗게 뒤집어 쓴 돌멩이를 보면서, 가끔씩 뿌려대는 마른 눈발 사이를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걷는 개 가슴에 까닭 모를 분노가 스며올랐다. 낯설어져가는 고향 마을을 떠올릴수록 나는 더 억울해졌다. 사운거리며 흔들리던, 때로 내 마음을 유독 출렁거리게 했던 신씨 종가댁의 대숲은 이제 빈 바람 소리만 뽑아낼 뿐이었다. 비어가는 집들,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뚫린 문들로 표상되는 그 마을을 어떻게든 보듬어안고 싶었다.
  작품 「돌」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소 풀을 먹이러 가서 보았던, 산사태에 떠내려가는 돌들의 이야기는 이십 수년이 지난 80년대 말에서야 내 가슴 속에서 세파에 휩쓸려 대처로 떠밀려가는 일가들의 이야기로 합쳐져 직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돌은 마을 사람들의 상징이면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돌들이 홍수에 떠내려가듯 세파에 밀린 마을 사람들도 휩쓸려 간다. 그들은 모두 "지난 수십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간다. 오랫 동안 함께 살았던 집과 친척들을 두고 새로운 사람과 길들여지다가, 다시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을 남겨둔 채 정처 없이 또 떠나간다. 그들은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데서 떠내려온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것이다. 길이 막히면 굽이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구름 이불을 덮고 길들여져 가다가 찬비를 만나면 또 떠밀려 갈 것이다. 그들의 행려를 짚어가는 남은 자들은 그들대로 걱정이다. 그래서 잠도 한 숨 제대로 자지 못한다. 떠난 돌들 역시 밤마다 별이 되어서라도 그곳 하늘에서 날고 싶어한다. 이런 상황의 직조를 나는 이 작품에서 시도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얽어매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 시절을 새롭게 털고 출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쉽게 풀릴 수 있었던가. 아직도 한 달에 한 두 번씩 노모와 누님을 뵈러 내려가는 그곳은 더욱 낯설어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낯설어져 있다. 반 이상을 모르겠다. 마을 배꼽마당에 있던 우물은 막혔고, 그 자리에 정자가 들어섰다. 신축된 마을 회관 경로당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입에 말이 올라붙은 할머니들이 모여 십 원 짜리 화투를 친다. 그러면서 누구 아들은 뭐를 사들고 인사를 온다느니, 돈을 몇 십만 원을 냈다느니 하는 말들로 사람들을 긁는다. 얼굴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무슨 별장 같은 집을 지어 꽃을 심고, 검은 아스팔트를 말끔히 깔고 도랑은 복개를 했다. 마을 한복판에는 '마을 중심 축산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로, 우사가 딸린 집으로 이사 오려는 사람을 윽박지르고 있다. 십수년 새에 고향 마을은 얼굴을 완전히 성형한 얼굴로 나를 아는 체 한다. 이미 내가 찾아야 할 고향 마을은 내 가슴 속에서나 처박혀 있다는 것일까. 어정쩡한 마을로 고향은 내 가슴에 찾아와서 우울하게 한다. 고향을 두고 고향이 사라졌다고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러나 어찌 고향이 그리 쉽게 우리 가슴에서 사라진다는 말인가. 평생 땅만 파먹고 살아가는 내 친구 재훈이의 아버지는 둘째 아들 사업 자금을 댄다고 전지를 저당잡혀 날려버리고도 오늘도 경운기를 몰고 논으로 향한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국동 할매는 매운 장죽에 불을 붙이며 찾아간 내게 소주를 한 잔 권하며, 그것도 못 마시느냐고 씨익 웃으신다. 그분들은 마치 마른 풀대와 한줌 씨앗들을 남기고 그 자리에 서서 사라진 지난해의 여뀌풀 같다. 한 자리에 매여 마른 풀들과 나뭇잎들을 다 뜯어먹는 어린 염소의 눈 같다. 마음 저 농로처럼 낮게 깔고 순한 저녁 연기를 풀어내는 굴뚝 같다. 인심 사나워진 그 바닥에 그런 분들이 아직 계시기에 나는 고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자위해 본다. 어제는 고향 집 마당에서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을 깔아놓고 잤다. 별소리처럼 두런거리는 노모와 동네 어른들의 소리를 내 귀는 만지면서 순하게 잠들었다가 해가 볼을 간지럽혀서 일어났다. 노모를 모시고 몇 달치가 밀린 납부금을 농협에 가서 내 드리고 들깻잎 몇 단을 얻어왔다. 마치 찬물에 더운물이 스미듯 고향은 이런 두 풍경이 겹치는 곳이다. 나는 그곳을 이미 떠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떤 불편함이 내 손등을 가슴을 들판을 가로질러가는 구름처럼 훅- 스쳐 멀리로 사라진다. 문득 지난 세월이 그립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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