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인의 시(Poem. 詩) 무엇인가?
글: 시인, 아동문학가 김 성 구 목사 (시인학교 교장,전남대,광주대,광주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序論 시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명확한 대답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사실 시인이면서도 시가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리라고 하면 참으로 곤란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해야할 때가 많이 있으므로 과연 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 강의록은 기초는 조지훈의 "시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도움을 받았다. 문학의 각 장르를 영문으로 표현한다. 문학장르 영문표기/ Literatureist 문학 / Poem 시 /poet 시인 / Sijo 시조 / Novel 소설 / Essay 수필 / Essayist Association 수필가 협회 Drama 드라마 / Writers 작가 / Litwrary 문인 1. 시의 정의 "시가 무엇이냐?" 는 질문에 필자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인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되고 느껴지는 모든 사항들을 시인의 사상과 시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시인의 전인격이 형상화된 언어의 율동적 조형이며, 압축된 언어와 생략된 언어와 과장된 표현과 시어를 통해 창작되어지는 제2의 피조물인 것이다. 시인 조지훈씨는 "시는 시인이 창조하는 제2의 자연"이라고 표현하였다. 기독교 시는 기독교 사상을 가진 기독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가운데 하나님의 숨결을 의식하며 작업한 시이다. 기독교 시는 하나님께서 시인의 삶 속에 역사 하심을 표현하는 작업이며 이 詩작업은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냄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남을 직접적 표현이나 간접적 표현을 기독교적인 시정신을 가지고 시어(詩語)를 통하여 노래하는 것이다. 2. 시인(詩人)의 정의 시인은 저 자신의 사상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저자신의 사상은 남에게 빌려온 지식이 아니고 남에게 배운 감각이 아니고 남이 찾은 이념이 아닌 저 자신의 속에서 무르익은 사상, 이것은 벌써 개념도 지식도 이론도 아닌 그의 인격이요, 취미요, 감정이다. 남의 시, 남의 학문은 저 자신을 이루는 요소는 되지만 저 자신의 사상이 없는 곳에는 저 자신의 시는 생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자신의 사상을 갖췄다고 해서 다 시를 쓸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형식을 통해서든 지 저 자신의 사상을 체득한 사람은 벌서 하나의 시정신을 체득하게 된다. 이 시정신을 詩형식에 용화 시켜 창조한 것이 시가 된다. 시인은 저 자신의 사상을 체득한 자가 시를 생산할 수 있는 시정신의 소유자이다. 저 자신의 사상을 시를 쓰기 위해 재편성을 할 수 있는 사람이요, 시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요, 인생 의미의 새로운 발견을 언어의 음률적 조형을 통하여 개성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3. 시인 수업 많은 사람들이 시인이 되기 위해 수업을 한다. 진정한 시인수업은 인간수업이 된다. 어떤 시인은 남의 시를 도용하여 등단하였다가 발각되어 창피를 당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시인 수업은 인격수양이다. 시인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의 훈련이다. 그리스도인의 시인수업은 그 최종 목표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데 있다. 시라고 하는 문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4. 시의 표현 살아 움직이는 우주의 질서 있는 율동의 멋을 표현하는 것이 시의 길이요, 그러한 시의 길의 구경태세는 이 기술을 통한 기술의 초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연초공장의 직공이 한줌 쥐는 권련개비가 어김없이 소정의 개수가 되듯이 한약방의 주인이 집어넣는 약의 중량이 틀림없이 저울대의 눈에 들어맞듯이 그 손끝에 천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무엇을 쓸 것인가는 문제 일 것이요, 차라리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면 쓸 것과 써야할 것은 너무 많지만 특수한 감동으로 시인 자신이 체득하지 못한 모든 생각은 시로서 볼 때 사해(死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감으로 오든지 주의력에서 오든지 이미 시의 생명이 될 생각이 마련되고 비장하거나 우아하거나 관조하거나 간에 이미 시의 피가 되는 느낌이 마련되면 필연적으로 시는 형성되고 마는 것이다. 시의 생명이 될 생각은 춤추는 관념이요, 시의 피가 되는 느낌은 외부에 튀어나오려는 언어와 합일시켜 춤추는 언어를 만듦으로써 튀어나오려는 관념을 잠재시킬 때 새로운 생명을 지닌 시가 탄생하게 된다. 1)생략과 부연 詩표현의 제1원리는 생략이다. 詩형식이 다른 문학과 구별되는 것은 복잡한 사상의 단순화에 있다. 시의 형식적 본질인 단순성은 그 내용에다 단면의 전체성이라는 특질을 제약하는 것이다. 손바닥 위에서 세계를 보고 한 방울 이슬 속에 우주를 본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의 완성된 모습 그대로 소우주요, 제2 창조의 형상을 보는 것이다. 시가 몇 마디의 언어로써 완성된 언어요, 살아있는 유기체라면 그는 혼돈과 복잡으로서 소재 그대로 방치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재창조를 통해 단순미의 설계로써 비약하면서 연락되고 나타난 이면의 무한광대성을 간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전달되기 쉬운 언어, 감명있는 언어, 기억되기 쉬운 언어, 언제 읽어도 실감 있는 언어라는 말은 그러한 언어에만 생명이 깃든다는 뜻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이 깃든 언어가 길다란 언어일 수는 없다. 생각은 긴데 글은 짧다는 것은 압축된 언어란 말이요, 압축된 언어는 생략된 언어이며, 이 압축과 생략 속에 확대와 전체가 들어가는 것이다. 난초잎은 차라리 水墨色. 난초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 잎은 한밤에 여는 다믄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 떳다 돌아눕다. 난초잎은 들어난 팔굽이를 어짜지 못한다. 난초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칩다. 정지용의 <난초> (정지용(1903-?)모더니즘 시문학의 선두주자) 최대의 생략이 명시의 기본임을 알 수 있다. 생략의 시는 소극적이며 자극적이요, 함축적이다. 그렇다고 생략만이 무조건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생략할 줄 알아야 하지만 이 경지를 체득한 다음에는 이 경지를 뛰어 넘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생략도 좋은 시를 만들지 못하고, 샘솟는 언어의 부연으로써 이루어지는 시는 더 아름다울 것이다. 거기에는 부연미의 적극적이요, 율동적이며, 서술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다. 사랑은 흘러가는 마음 위에서 웃고 있는 가비여운 갈대꽃인가 때가 오면 꽃송이는 고아지고 때가 가면 떨어지고 썩고 마는가? 이상화의 <이별 >중에서 2)해조와 변조 시표현의 제2원리는 해조이다. 시형식이 다른 문학과 구별되는 또다른 하나의 특질은 언어의 율동적 조형이다. 시는 노래하는 정신의 그림자요, 조각하는 마음의 음악인 것이다. 해조(諧調)란 잘 조화된 율조로서 일종의 정형(定型)이며, 변조(變調)는 해조가 파기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변조를 통해 시의 시대적 해조를 이루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시가 노래하는 정신에서 출발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힌 서름에 잠길 테요 五月 어느 날 그하로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곷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흔히 쓰는 시의 정형을 파괴하는 자유분방한 시격을 만들었다는 지적을 받지만 결국 그 뜻은 그의 내재율이 새로운 해조를 이루었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김영랑의 해조는 산문의 자유성이 얼마나 시정신의 순화된 율격 안에 무르녹아 있는가. 내가 너를 찾아 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 구나. 새벽닭이 울때마닥 보고싶었다....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순아, 이것이 몇 萬時間만이냐. 그날 꽃 喪輿(상여) 산넘어서 간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뷘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오고 .......... 중략... 순아 너 인제 모두나 앞에 오는구나. 서정주<부활> 한사람의 시인으로 존립하기까지에는 자기류의 해조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개성적 해조란 것은 개성적 언어의 발견 구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詩)는 시간적(時間的) 예술(藝術)이다. 詩와 時 ! 3)과장과 반복 시표현의 제3원리는 과장이다. 세상에서 흔히 시인과 소설가를 거짓말 쟁이라고 한다. 이 말에는 확실히 일면의 진실이 있다. 가령 구름이 자고 간다는 시를 보고 구름이 잔다니 무슨 것짓말이냐 하기도 하고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 해서 소설을 것짓말이라는 것이다. 만일 있는 것만 그대로 써야 한다면 시나 소설은 일체 예술성은 성립될 수 없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렬은 사랑보다 강하다 ......... 번영로<논개> 과장은 생략미의 필연한 귀결이다. 시형식의 반복에는 <동어반복>과 <유어반복>이 있다. 먼훗날에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말이<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김소월<먼 후일>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 너 오오래 정들었고 살다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엇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중략 박두진 <어서 너는 오너라> 반복을 해조의 귀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5. 시의 율격 시는 문학의 여러 양식 가운데서 그 일방의 극을 대표하는 종목이다. 시에 담겨있는 사상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정서적 표현이다. 1)정형시 정형시는 시의 표현형식에 어떤 규격을 정해두고 그 율격 안에서 창작된 시를 가리키는 것이니 바꿔 말하면 언어의 운율적 생성을 위한 일정한 규범으로써 시정서의 표현을 유효하게 고조하려는 시의 한 방법이다. 음성률:음의 고저를 따라 배율하는 것이다. 음위률: <각운><요운><두운>이 있다. 각운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 어드메뇨 고풍도 참도찰사 궂은비는 무삼일고 뉘라서 내행색 그려다 임계신데 드릴고 효종<1619-1659,조선조17대 임금> 요운 질경이를 캐러가세 치마폭에 담고 오세 질경이를 캐러가세 허리춤에 끼고오세 유석빈 엮 <시경> 두운 말리지 못할만치 몸부림 하며 마치 천리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여볼까 2)자유시 자유시는 정형시의 제약에서 해방된 자재한 표현형식으로 일정한 규격에 구애되지 않고 창작되는 시이다. 그러나 시의 일반성은 리듬의 고조에 있기 때문에 자유시는 정형의 율격 안에 사로잡히지 않으되, 별반의 율격을 형성하므로 자유시는 그 한수 한수가 그 시인의 율격이요, 형식인 것이다. 요컨대 자유시는 정형시의 규격을 벗어남으로써 시정신을 자유롭게 확장 활용한 것이요, 산문에 시적 운율을 배정함으로써 형식에 있어서 산문의 자유성을 얻고 내용에 있어서 운문적 율조를 얻어 이 양자를 조화하는 곳에 자유시가 위치하는 것이다. 3)산문시 산문시는 정형시의 규격을 탈출함은 물론 자유시보다도 더 자재한 형식으로 창작되는 시이니 시정신의 가장 자재하고 평범한 표백의 형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문시는 자유시에서 출발하여 자립한 것이니 표현력이 왕성한 시인에서만 걸작이 기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시가 되느냐 평범한 산문이 되느냐 하는 것이 형식에서 보다 내용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산문시의 난점은 산문이면서 시의 율조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산문을 '운율은 없으나 율조를 갖춘 것' 이라고 말했다. 시에서 멀리갈수록 산문적이며, 산문에서 멀리 갈수록 시적이다. 4) 시조(Sijo)에서의 율격 이 내용은 PC통신 천리안 시조 대중화운동에서 갈무리하여 가져왔다.(1998.11.2 화면 갈무리한 날) 한국인에게는 한국인만의 독특한 언어적 율조가 있는 바, 이것은 시조라는 장르에 잘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굳이 장시나 산문시를 줄인다면 결국 시조의 형식에 이를 수 있듯, 시조는 할 말만을 한다. 주변적인 수식어들을 과감히 멀리한, 짧지만 명쾌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다. 따라서 시조는 소위 압축이며 응축이라고 할 수 있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의 '석류' 모두> 초장에서 석류의 생김새를 의인화하며 상을 일으켜 자신이 처한 현실이 고통으로 얼룩져 있고 아픔으로 찌들어 있음을 '투박함'과 '두툴함'으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중장에서는 석류알 낱낱을 통하여 답답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즉, "암담한 조국의 현실(참담한 자신의 삶)을, 피맺힌 그 많은 울분들을 어떻게 조목조목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다. 결국, 종장의 개인시어 '빠개 젖힌'(석류의 개열)에는 해방된 세상을 지향하는 서정적 자아의 마음이 역력하다. 짧은 시조(단시조, 평시조)는 3·4조와 4·4조가 주된 율조로 쓰이지만, 시조의 율격은 음수율이 아닌 음보율이므로, 시조시인의 호흡에 따라 2·3, 2·4, 2·5, 3·2, 4·2, 5·2, 3·3조 등 율조의 다양한 변용을 이룰 수가 있다. 앞에서 시조시인의 호흡에 따라 2·3, 2·4, 2·5, 3·2, 4·2, 5·2, 3·3조 등 율조의 다양한 변용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 예를 들어 보이도록 하겠다.(하나의 사선은 '음보'를, 두 개의 사선은 '구'를 각각 나타내기 위해 필자가 표시한 것) (1) 초장: 울너머/허연 실비//실비 밖은/하아프 소리 중장: 문득/잊혀간 날들//책갈피에/끼워 놓고 종장: 떨다만/현을 내려와//산사 쪽으로/가는 그대 <민병도의 '실비' 모두> 민병도의 <<지상의 하루>>라는 시조집에서 발췌하였다. 먼저 초장부터 보자. 3/4//4/5로 되어 있다. 즉 제1구는 3·4조로, 제2구는 4·5조로 운율을 형성한 것이다. 제1구는 우리가 익히 해온 율조이나 제2구는 그러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율조가 어색하거나 시조의 흐름을 거스르거나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장은 2/5//4/4로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2·5조도 가능한 것이다. 물론 4·4조는 이미 익숙해진 율조이다. 종장은 3/5//5/4로 되어 있다. 흔히 종장 하면 3/5//4/3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종장의 제1구만 3/5∼9를 지켜주면 된다. 그리고 각 음보는 대개 2∼5자 사이에 자연스럽게 넣어주면 된다. 솔직히 이것도 절대적은 것은 아니나 대개 이 범주 안에 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거와 설명은 주역의 생수(生數)와 성수(成數)를 적용하여 후에 논하겠다. 주의할 것은 종장 제2구(전체로 보았을 때에는 제6구)의 경우 [산사(山寺) 쪽으로/가는 그대]로 끊어 읽어야지 [산사(山寺) 쪽으로 가는/그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7·2가 되어 자칫 파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조의 읽기는 이래서 남다르다. 다른 시조시인의 예를 더 들어보자. (2) 초장:그 잡놈/방죽에 빠져//저승 길목/걷더니(3/5//4/3) 중장:잿골 분이/못잊어//꼭 보름/저녁이면(4/3//3/4) 종장:뿔 달린/우직한 흰소로//동산에서/울고 있네.(3/6//4/4) <박현덕시조집 <<겨울 삽화>> 중 '이중섭-흰소' 모두> (3) 초장:감의 씨를/잘그시 쪼개면//작은 스푼/들어 있다(4/6//4/4) 중장:흙 속에/썩어지면//단물 들어/일용할 양식(3/4//4/5) 종장:내 죽어/내 영혼 銀스푼은//어느 땅 시로/태어나랴.(3/7//5/4) <이상범시조집 <<내 영혼 은스푼은>> 중 '작은 스푼' 모두> '시조의 자수 한계'에 대해 설명하겠다. 1·2·3·4·5는 오행 생수(生數)이고, 6·7·8·9·10은 오행 성수(成數)이다. 이를 전제로 하여 시조의 자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각 음보별로 자수의 범위를 한정한 것은 다음과 같다. 초장:2∼5/2∼5//2∼5/2∼5→천:양 중장:2∼5/2∼5//2∼5/2∼5→지:음 종장: 3 /5∼9//2∼5/2∼5→인:충 종장 제1음보와 제2음보를 제외한 나머지 음보들이 모두 오행 생수에 바탕하고 있다. 오행 생수 중 '1'은 제외시켰는데 때에 따라서는 한 자가 한 음보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시조든 현대시조든 간에 이러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왜 그런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러면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5자를 넘어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는 종종 있다. 특히 현대시조에 이르러 잦아졌다. 이 또한 왜 그런가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일단 여기서 열어둘 수 있는 말은 한 자일 수도 있고 다섯 자를 넘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한정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토대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하나의 보편적 기준을 제시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단순한 빈도수에 의해 도출한 것만은 아님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또한 한국인의 철학과 시조가 무관하지 않다는 전제 하에 마련된 규준임도 알아주기 바란다. 이제 종장 제1음보와 제2음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주지하고 있듯이 종장 제1음보는 석 자로 고정되어 있다. 우선 이 숫자는 상징적인 수이다. 한국인의 '삼(三)'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초장·중장·종장이 천지인 삼재(三才)에 터잡고 있듯이 종장 제1음보는 초장(하늘)과 중장(땅)을 잇는 충기(沖氣)의 역할을 한다. 비로소 조화를 이루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상(想)'의 전환점이 되기에 '3'이라는 고정 자수를 취하게 된 것이다. 별다른 변화가 없던 초·중장을 이어받아 일대 파장을 일으키는 변화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종장 제2음보는 다른 음보들에 비해 자수가 늘어난다. 그러나 종장 제2음보 역시 기본 자수는 '5'로 오행 생수이다. 다만 오행 성수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음보가 바로 종장 제2음보이다. 한편 '10'은 완전수라 대개 배제된다. 왜냐하면 그 뒤에 읽히는 맛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느슨해지거나 설명적이 될 수 있다. 시조는 긴장과 이완임을 증명하는 부분이다.(종장 제2음보와 제3음보와의 관계는 '긴장') 그렇다면 각 구별 자수의 범위를 한정해 보자. 초장:6∼10//6∼10 중장:6∼10//6∼10 종장:6∼10//6∼10 즉 각 구는 오행 성수를 바탕으로 한다고 보면 된다. 다만 '10'은 완전수라 꺼리는 바가 있고, 종장 제1구 역시 10자를 넘길 수는 있으나 대개 9∼10자 이내로 묶어두려는 성향이 짙다는 것을 굳이 보태고자 한다. 6. 시의 목적 문학은 인간을 창조하는 가치인데 인간은 무엇 때문에 문학 가치를 요구하고 문학을 창조해야 하는가. 모든 생물체의 운동은 어떤 내적 원인을 지닌다고 한다. 생물의 운동은 욕망의 표현이란 말이다. 시인은 먼저 시인이 되어야 하고, 끝가지 시로서 인생에 보람을 느껴야 한다. 시는 우주의 생명적 본질이 인간의 감성적 작용을 통해 표현되는 언어의 순일한 구상이다. 시는 독특한 언어의 순일한 구상을 통해 표현되는 인간의 감성적 작용이 우주의 생명적 본질에 융합하는 길이라는 말이다. 시인은 항상 사랑 속에서 한 마리의 곤충과 한포기의 풀잎에서도 생명의 향수를 느끼고 창조주의 손길을 발견하며, 사랑을 베푸는 인간이어야 한다. 7. 시의 구조와 내용 시는 보편적을 행과 연으로 구분한다. 행이 모여 연이되고 여이 모여 한 편의 시가 된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1행 1연의 형태로 끝까지 이어쓰는 시들도 있다. 제목 .............. 1연 1행 ............... 2행 .............. 3행 ............... 2연 1행 ............ 2행 ............ 3행 ........... 또한 내용분석으로 나눠보면 인물을 중심하여 그 사람의 일대기나 업적을 중심하여 쓰는 인물시(人物詩)도 있다. 역사를 역어 그 의미를 되새겨 가는 역사시(歷史詩)와 정치역정을 기술하면서 나아가는 정치시(政治詩)와 자연을 예찬하며 쓰는 상록시(常綠詩)와 삶의 부분들을 엮어가는 생활시(生活詩)와 복음을 전하며 문학의 형식을 빌어 선교의 목적을 다하는 선교시(宣敎詩)도 있다. 이처럼 시의 주제 선정은 자유롭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표현하며 시인의 춤추는관념을 표현하되 절제하면서 율동적 언어로 제2의 피조물을 탄생시키느냐가 관건이다. 아무리 자유로운 시라고 해도 시는 조직이 있고 구조가 있어 시로써 갖춰야할 기본들이 있다. 모든 구조와 형식을 뛰어 넘어도 그는 그의 새로운 구조와 조직 속으로 변화된 것 뿐이다. 화가가 처음부터 추상화를 그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구상화를 그리는경지를 넘어서 추상화로가는 것이다. 구상화는 할 줄 모르면서 무작정 페인트만 칠하는 비구상은 예술적 가치를 상실한다. 그처럼 시의 창작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기본적인 시의 형태들을 차례로 공부하고 그러한 시의 기본 형태들을 따라서 창작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경지를 넘어서 자유로운 시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의 작업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시의 형태에 따라 그 표현되는 향기가 다르게 된다. 結 論 그리스도인들이 시를 쓰는 것은 단순히 문학의 한 분야에 종사하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시를 쓰든지 그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신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받으시기 합당한 거룩한 산 제사로서 드려야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시창작 활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문학적 예배요, 시라고 하는 산 제물을 드리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시창작은 거룩한 신의 성품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고 그 베푸신 은혜를 찬미함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요, 그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 나라 영광이 넘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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