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민박, 편지 1 / 김경주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인편이 잘린 외딴 바닷가 민박집,
목단이불을 다리에 둘둘 말고 편지를 썼다
들창사이로 폭설은 내리고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들을 만지고 있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처럼 쌓여갔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쓰다만 편지지로 소금바람이 하얗게 쌓여 가는 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움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쓸쓸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푹푹 끓기 시작하고
방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몸은 피 속에서 눈물을 조용히 번식시켰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 불면은
나 아닌 곳에 가서 쌓이는 가혹한 삶의 은유인가
눈발은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씩 덮어 가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혹성같은 낱말들을
편지지에 별처럼 새겨 넣곤 하였다
폭설, 민박, 편지 2 / 김경주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벤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 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조금씩 풀어 넣은 그림들은
모두 내가 꿈꾼 푸른 죄는 아니었는지
새 ·나무· 별· 그리고 눈
사람이 누구하고도 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그러한 것들을 한 몸에 품고 잠드는
머언 섬 속의 어둠은
밤늦도록 눈 안에 떠있는데
어느 별들이 물이 되어 내 눈에 고이는 것인가
바람이 불면 바다는 가까운 곳의 숲 소리를 끌어안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그러나
나무의 속을 열고 나온 그늘은 얼지 않고
바다의 높이까지 출렁인다
비로소 스스로의 깊이까지 들어가
어두운 속을 헤쳐 제 속을 뒤집는 바다,
누구에게나 폭설 같은 눈동자는 있어
나의 죽음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눈동자를 잃는 것일 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프고
눈 안을 떠다니던 눈동자들,
오래 그대의 눈 속을 헤매일 때 사랑이다
뜨거운 밥물처럼 수평선이 끓는가
칼날이 연필 속에서 벗겨내는 목재의 물결 물결
숲을 털고 온 차디찬 종소리들이
눈 안에서 떨고 있다
죽기 전 단 한번이라도 내 심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 만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언젠간 세상을 향한 내 푸른 적의에도
그처럼 낯선 비유가 찾아오리라는 것
폭설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
하늘의 일부분이었던 눈들을 주워 먹다보면
황홀하게 얻어맞는 기분이란 걸 아느냐
해변에 세워둔 의하자나 눈발에 푹푹 묻혀가는 지금
바라보면 하늘을 적시는 갈매기
그 푸른 눈동자가 바다에 비쳐 온통 타고 있다는 것을
나무에게 / 김경주
매미는 우표였다
번지 없는 굴참나무나 은사시나무의 귀퉁이에
붙어살던 한 장 한 장의 우표였다 그가
여름 내내 보내던 울음의 소인을
저 나무들은 다 받아 보았을까
네가 그늘로 한 시절을 섬기는 동안
여름은 가고 뚝뚝 떨어져 나갔을 때에야
매미는 곁에 잠시 살다간 더운
바람쯤으로 기억될 것이지만
그가 울고 간 세월이 알알이
숲 속에 적혀 있는 한 우리는 또
무엇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냐
모든 우표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연이다
허나 나무여 여름을 다 발송해 버린
그 숲에서 너는 구겨진 한 통의 편지로
얼마나 오래 땅 속에 잠겨 있어 보았느냐
개미떼 올라오는 사연들만 돌보지 말고
그토록 너를 뜨겁게 흔들리게 했던 자리를
한번 돌아보아라 콸콸콸 지금쯤 네 몸에서
강이 되어 풀리고 있을
저 울음의 마디들을 너도 한번
뿌리까지 잡아 당겨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굳어지기 전까지 울음은 떨어지지 않는 법이란다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순면을 문지르고 있다
안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죄 많게 그 꽃무늬가 내 볼에 어린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 순간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던 것처럼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으리라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 송이 몇 점 다가와 곱게 물든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맑은 꽃물이 똑똑 떨어진다
눈덩이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 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는다
1976년 전남 광주 출생
혼 불 주최 김명희 문학상 당선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년 랜덤하우스중앙)
초대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얘기다!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김경주 시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선보인다. 2005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시 “김경주의 시는 젊고 패기가 있다. 거침없는 언어들이 시적 효과 속에서 기운생동한다. 자유로운 의식이 자유로운 표현을 창조해내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이 있다.”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시집 속에서의 그는 그저 그다움으로 새로운 시의 지형을 그려내는 데 있어 독특한 화법을 자랑하고 있다. 멋 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시, 어디 그리 흔한가. 그의 붓은 어느 상점, 어느 상인에게서 사들인 것이 아닌 스스로가 오랜 시간 동안 들어앉아 만들어낸,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으로 그밖에는 주인이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점에서 값지다.
이 시집을 읽는 키워드는 일단 ‘바람’에 둘 필요가 있다. 불고 있으되 보이지 않으며, 소리는 나되 침묵으로 들리는 바람, 그것은 시간, 그 최초의 얼굴과 판박이처럼 닮은 것이다. 그의 시 「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이를테면 빙하는 제 속에 바람을 얼리고 수세기를 도도히 흐른다/…몇백 년동안 녹지 않았던 눈들을 우리는 지금 먹고 있는 거야 얼음의 세계에 갇힌 수세기 전 바람을 먹는 것이지/…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라고 말했듯이, 그에게 바람은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이며 원처럼 연결되어 있는 순환 고리인데, 그는 그 고리들의 연결로 인해 마모되었을 어떤 ‘축’을 빛나는 이로 반짝이게 만들 줄 안... [인터파크 제공]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본다는 김경주는 흰 운동화와 자전거를 좋아하는 젊은 꽃미남 작가다. 현실과 공상 사이를 쉼없이 넘나드는 그는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삼성생명에서 카피라이터를, EBS에서 사회과학 탐구 부문 구성작가를 했고 서강대 철학과 재학 중 친구들과 독립영화사 <청춘>을 설립하여 무모하고 아름다운 단편영화 작업들을 하기도 했다.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지독한, 아주 지독한 서정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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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6-08-11 20:50] |
[중앙일보 손민호] 소문은 봄바람과 함께 불어왔다. 김경주 읽었어? 얼굴도 잘생겼다며? 2003년 등단한 서른 살 시인에 관한 소문은 장맛비 들이쳐도 그치지 않았다. 개중엔 첫 시집을 내겠다고 몇몇 출판사가 경쟁을 벌였다는 것도 끼어 있었다.
수개월의 소문은 끝내 시집 한 권을 해산했다. 제목부터 눈에 띈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평론가 권혁웅의 추천사에도 눈길이 머문다. '시집은 한국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 아무리 추천사래도 이렇게 거창할 수가. 시인의 외모도 직접 확인했다. 음…, 할 말 없다.
시는 지독한 서정시다. 문법적으로 옳은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달리 부르고 싶지는 않다. 지독하다고, 꼭 부르고 싶다. 그래야만 곱고도 슬픈, 그러나 가볍거나 빤하지도 않은 김경주의 시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부터 보자.
'고향에 내려와/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네./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사실을./…/안감이 붉어지도록/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이었네.'
어머니의 꽃무늬 팬티에서 시인은 어미의 여성성을 찾아낸다. 어미라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처연하다. '어느 날 아버지의 귀두가 내 것보다 작아졌다.'며 시작하는 시도 있다. 여태 어느 시인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던 대상을 시인은 담담하게 시로 끌어왔다. 아비의 굽은 등이나 처진 어깨가 아니라 작아진 귀두이기에, 아비는 생산력을 소멸한 늙은 수컷이 된다.
시집에 따르면 시인은 가난했다. '누이들은 짜놓은 연고처럼 바닥에 흘러 잔다/그 옆엔 찰흙으로 빚어놓은 가족들,/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다'('우주로 날아가는 방 3'부분) 시인은 지금도 가난하다. 12년을 자취했고 낡은 여관을 전전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지는 않았다. '나는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 밖에서 나를 웃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인형증후군 전말기'부분)
지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익숙한 듯싶지만 김경주는 '아비의 귀두'만큼 더 나아가 있다. 낯선 것 같지만 이미 가슴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시 몇 수 고이 옮기고픈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어 한 구절만 달랑 싣는다.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그늘이 비리다'('목련'부분)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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