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에지야

詩想은 전율처럼

달그리매 2006. 7. 13. 14:39
詩想은 전율처럼 - 이기철


한때 나는 시에서까지도 知的인 호사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습작시절의 추억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나는 내가 문학공부를 하고 있던 대학시절에 시를 매우 엄격하고 고답적인 태도로 바라보려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60년대 초반이지만, 그때는 우리 시단에 주지적인 기분이 팽배했고 상징주의적인 분위기도 성행했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 이를테면 말라르메나 발레리의 시, 그리고 쥴 쉬뻬르비엘이나 라포르그의 시들을 즐겨 읽었고 특히 발레리의 名句인 '백 사람이 한 번 읽는 시가 아니라 한 사람이 백번 읽는 시'를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어트의「네개의 4중주」나「황무지」번역본을 반쯤은 외웠고 그것이 시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긍지인양 생각하고 있었다. 비교적 어려운 편인 이러한 시들을 조금씩 씹고 음미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 그야말로 시에 대해서까지도 버리지 못했던 일종의 딜레탄트적인 호사취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지적인 시보다 감성적인 시가 좋다. 저급한 철학보다 고급한 감성이 돋보인다. 감성은 누더기가 아니라 정결한 지적 의상이며 그것에 귀 기울이면 거기에는 다른 어떤 것도 들려줄 수 없는 조용한 깨우침이 들어 있다. 즐기면서 깨우치는 일, 그것은 실로 삶의 가운데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동반자가 아니다. 고의로 어렵게 쓰는 시나 억지스러운 센티멘탈리즘을 벗어던지면 담백하고 순연한 맛을 지닌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가 저무는 들길을 달린다. 구름장이 바삐 기차 뒤로 사라지고 가끔 어린 새들이 날개를 저으며 구름장 뒤로 숨는다. 낮은 산등성이로 경사가 오히려 아름다운 푸른 나무들이 서 있고 나무들 잎새 위로 붉은 놀 몇 자락이 물들인 한복처럼 낮게 펄럭인다. 차안은 조용하다. 가끔 아이의 울음 소리와 치차 구르는 소리가 없었다면 차 안은 정말 정적이라고 할만하다. 천안을 지나 신탄진, 대전을 지나 영동, 기차는 주어진 선로를 벗어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추풍령을 거쳐 김천 구미로 치닫는다. 산기슭에 세워놓은 입간판들만 없었다면 골짜기마다 엎드린 마을의 지붕들과 마을을 감고 흐르는 작은 시냇물은 한갓 풍경화에 불과한 것일 뿐, 마을 앞 텃밭에 자라는 상추, 시금치들은 꿈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곳에 아무도 큰 소리로 삶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어둠 속에 묻혀가는 지붕과 지붕들 사이, 처마와 처마사이에는 곧 불이 켜질 것이고 불 켜진 마루에서 가장들은 저녁식사를 하고 오늘 하루의 고단한 손과 발을 쉴 것이다. 자기를 강변하고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동분서주하지 않는 삶이 저녁놀과 밤의 어둠 속에 말없이 묻힐 것이다. 그때 내게는 불현듯 한 구절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단순한 말이면서 곧 일상어를 넘어 시상으로 이어졌다.. 메모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노래는 작게 불러야 크게 드립니다.

지나고 나면 꿈결일 뿐인 저 마을과 섬돌 위에 신발을 벗어두고 오늘밤 단잠을 잘 사람들을 작은 풍경화처럼 바라보며 어떻게 그것의 노래를 웅혼하고 장엄하게 부를 수 있을 것인지? 만약에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나로서는 그런 것은 허위의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기차가 달리는 만큼 빨리 視界에서 사라지는 능선과 마을, 시내 자락과 들판들이 기적같이 나타났다가 이슬같이 사라진다는 생각도 그래서 메모지 위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급히 지난 마을과 능선들은
기억 속에서는 불빛이고 잊혀지면 이슬입니다.

이런 구절은 조금 수사적이긴 하지만 그런 시상을 떠올린 정황으로 보면 나로서는 진실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시상은 전율처럼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나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급히 찾아든 것이다.

얼마 전에 낸 시집『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에 실려 있는「下行線」이라는 시는 그렇게 해서 쓰여진 것으로 전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삶의 노래는 작게 불러야 크게 들립니다.
상춧단 씻는 물이 맑아서 새들은 놀을 둥지로 돌아오고
나생이 잎이 돋아 두엄밭이 향기롭습니다.

지은 죄도 씻고 씻으면 아카시아꽃처럼 희게 빛납니다.
먹은 쌀과 쑥갓잎도 제 하나 목숨일 때
열매를 먹고 뿌리를 자르는 일 죄 아니겠습니까

기차도 서지 않는 간이역 지나며
오늘도 죄 한겹 벗어 창밖으로 던집니다.

몸 하나가 땅이고 하늘인 사람들은
땀방울이 집이고 밥이지만 삶은 천장이 너무 높아
그들은 삶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기운 자리가 너무 커서 더 기울 수도 없는 삶을
쉰살이라 이름 부르며 온돌 위에 눕힙니다.

급히 지난 마을과 능선들은
기억 속에서는 불빛이고 잊혀지면 이슬입니다.

시상이 찾아오지 않아서 애태우는 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느닷없이 찾아온 시상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깎이고 삭제되어 처음과는 아주 다른 모양의 것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려 하다보면 본래는 의도하지 않았던 말들이 우발적으로 끼어들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우발적으로 끼어드는 시행,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그런 구절에서 정채를 찾을 수 있고 더욱 애착을 느낄 때가 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제 기운 자리가 너무 커서 더 기울 수도 없는 삶을
쉰살이라 이름 부르며 온돌 위에 눕힙니다.

이 구절은 처음에는 시상 속에 없었던 것인데 시를 완성해 가는 도중에 우연히 끼어들게 된 것이다. 시의 전후 맥락에서 필연적이지도 않는 말을 삽입시킨 것인데 완성하고 난 뒤에 보아도 그다지 흠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숨겨놓은 치부를 드러낸 듯한 부끄러움은 있지만 거짓은 아니라는 생각이고 또한 이 구절이 못난 제 아이를 바라보듯 애착이 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마음이다. 첫 행부터 대상에 대한 묘사이다가 여기 와서 주관화된 모습을 보인 것이긴 하지만 서정시의 본질과 속성이 주관화를 떨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굳이 이 구절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바라보면 삶 가운데는 슬프고 애처로운 것이 너무 많다. 슬픔 때문에 힘 있는 시를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힘 있는 시를 위해 긍휼과 애상을 고의로 버릴 마음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속삭이듯 다가서는 서정시의 매력, 그것은 소박한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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