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동백 / 이규리
한 나무에서 가지와 또다른 가지가 불화에 시달렸으나
내게 있어서 꽃이란 참았다 터트리는 기침 같은 것.
돌아앉아 우는 울음 같은 것. 싸고 싸 놓았던 내 몸이
붉게 우는 울음 아버지 모른 체 문턱으로 단단한
음성이 드나들었다 아직도 핏줄 속을
도는 아버지의
지시사항 토해 내는 날, 내 꽃송이 채 툭 떨어질까 절
정에서 멎는 한 생애처럼
겹동백 보면 아버지 생각난다 164센티미터 내 키만
큼 키운 동백 두 그루, 그
나무 나와 같이 자라며 피끓
는 시간 나누었지만 꽃송이처럼 내 몸에 박혀 있었던
붉은 반점들, 겹으로 두른 몸의 조임들, 어떤
정열은
그늘이 되었다 아버지 가시고 몸 속에 자란 겹동백 뽑
아보니 흙 묻은 꿈 버석거리며 입 속을 맴돈다 내 사
는 동안
끝없이 헹구어야 할 저문 아버지 동네의 그
늘. 한사코 붉어지는 고집처럼 내 울음의 빛깔은 겹꽃
잎 사이에 있다
-<앤디 워홀의 생각>
백련사 동백숲 3 / 김선태
백련사 동백숲은 대낮에도 어둡다. 이파리들은 햇빛을 받으러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고,
나무 몸뚱이며 가지들은 헐벗어 적나라
하다. 거기 서늘한 고요가 그늘을 친다.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동백들. 가지가
부러지고 잘릴 때마다 수액으로 둥그렇게 감
싸고선 다시 길을 간다. 상처는 옹이가 져서 공처럼 둥글고 단단하
다. 저 암처럼 깊은
상처 속 모진 세월의 모늬와 사랑이 있다. 옹이
가 진 길은 삐틀삐틀하거나 울퉁불퉁하다. 가지들이 허공을 향해
수많은 길을 내고
길을 버린다. 무수한 길들이 서로 촘촘하게 만나
고 헤어지는 가지의 끝. 그 길의 정점에서 비로소 피는 동백꽃을
보라. 잔설을
둘러쓴 채로 피어나는 저 상처의 꽃을 보라. 그 수만
송이의 꽃불들로, 생살을 찢고 나오는 열혈로, 추위 쟁쟁한 강진의
하늘
한쪽이 아직 뜨겁다.
-<흘러가는 것들은 눈물겹다>
붉은 동백 /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맨발>
동 백 / 이도윤
얼어붙은 하늘 몰아치는 바람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바람에 실려 수만리 날려온 겨울새
어미를 잃었나 서방을 잃었나
그리움 끝없는 세상이라
피붙이들 또다시 흩어지고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남쪽바다 절벽 위 외발로 서서
갈 곳 없는 하늘에 붉은 피를 쏟는다
-<너는 꽃이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동강의 높은 새>
백련사 동백숲 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네 애틋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
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네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즐거움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물결로든
씻어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보긴 걸어볼 참인가
-중앙일보:문예중앙 / 미당문학상수상작품집중에서
동 백 / 박남준
- 미황사에서 -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 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꽃의 무상함도 일별 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
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갔던 건
거기 내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선운사 동백꽃 / 박남준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습니다.
대웅전 뒷산 동백꽃 당당 멀었다 여겼는데요
도솔암 너머 마애불 앞 남으로 내린 한 동백 가지
선홍빛 수줍은
연지곤지 새색시로 피었습니다
휜 눈 밭에 울컥 각혈을 하듯 가슴도 철렁 떨어졌습니다그려
- 문학동네<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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