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묘지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 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山頂)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天上)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산정묘지, 민음사, 1991>
-1992년 제6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이해와 감상
조정권은 섬광과 같은 직관(直觀)의 힘이나 섬세한 감성(感性)의 눈으로 세계를 파악하지 않는다.
조정권의 세계 인식은 그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에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정신 세계의 지형도를 완성하려는, 고투에 찬
정신의 상승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이 긴 시에서, 쉽게 의미를 알 수 없는 관념적인 시어들과 비유들에서 조정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장중하고 현란한 시적 장치들에 비해 의외로 단순한 바가 있다. 그는 세계를 수직적인 상상력에 입각하여 바라본다.
시 속의 화자는 지금 겨울 산을 오르고 있다. 산은 대체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행위만이 가능한 수직의 공간이다. 화자가 산을, 그것도 겨울에
오르는 것은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가 `천상의 누각을 꿈꾸'는 자이므로 정신은 `가장 추운
곳'으로 표현된 극한 상황에서 가장 강도 높게 단련된다.
얼어붙은 겨울 산은 결빙의 견고(堅固)함과, 모든 사물이 제 스스로의 힘에
꼼짝없이 도취해 있는 정적(靜的)인 침묵,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에 바치는 염결성(廉潔性)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은 이들에
대해 각기 역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결빙은 형상이 얼어붙어 굳는 것이 아닌, `물과 물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노래를 들려주는 생성의 리듬을
갖고 있다. 시인은 결빙의 바람이 자신의 핏줄 속으로 회오리쳐서 전신을 관통하고 점령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면 시인은 스스로 도취할 수 있는
침묵의 상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잠든 정신은 /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
깊은 휴식에서 시인을 깨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은 `나의 영혼이 크게 내는 손뼉 소리'이다. 결빙은 생성 에너지를 품은 침묵이며, 결빙의 침묵
속에서 생성의 힘을 분출시키는 것은 영혼을 일깨우는 정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적 지향점을 표징하는 정신의 지향점은 어디인가. 정신은
무수한 가슴이 바쳐진 하늘을 향해 빛의 축복이 쌓인 천국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정신의 수직적 상승은 가시적인 높이를 지닌 겨울 산의
정상(頂上)에서 질적인 비약을 하여 허공의 하늘로 계속된다. 이 시의 제목인 `산정 묘지'는 `산정'이라는 구체적인 높이에서 `하늘'의 높이를
획득하기 위한 중간지점을 뜻하는 비유이다. `산'은 가시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육체의 공간이지만, `하늘'은 신비의 빛으로 현현된 본질과 영혼의
공간이다. 이 두 개의 대립적인 세계를 매개하기 위해 조정권은 `묘지'라는 메타포를 설정한다. 조정권이 이 묘지에 묻으려고 하는 것은 죽은
정신이며, 죽은 정신에 속박당한 `헌 누더기'에 불과한 육신일 터이다. 손뼉 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살아 있는 정신만이 이 침묵의 묘지에서
다시 부활하여 하늘로 비상할 수 있다. [해설: 최동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