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지문
류외향 들판 한 가운데 묶여 있었다 꽃을 피우지 않는 풀들이 발목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풀들의 몸을 관통 했다 나는 살비듬 냄새를 풍기며 어떤 몸짓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이방인 의 눈으로 그 몸속에서 혈류처럼 흐르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풀들은 가늘 게 떨리며 서로의 몸을 부비고 쓰다듬었다 어디선가 더 큰 바람이 불어왔 다 풀들은 휘어지고 휘어지더니 일제히 누었다가 한꺼번에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오십육억 칠천만의 풀들은 한 몸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 을 그들의 순결한 육욕주의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너무 무거워진 나는 아무래도 휘어지지 않았다 바람도 햇살도 담을 수 없는 외계 종족이었다 햇살은 따스했으나 나는 서늘했다 바람은 부드러웠으나 나는 거센 폭풍 에 시달렸다 내 마음의 낭자한 무늬는 누가 읽고 가겠는가 발목을 접고 무릎을 접고 허리를 내렸다 후손 없는 봉분처럼 웅크린 나는 직립의 기억 을 잊기 위해 더 오래 외로워야 했다 2005년 리토피아 겨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