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나

정오의 순례

달그리매 2006. 9. 9. 11:03

정오의 순례

                             - 思惟를 담을 그릇이 나에겐 시밖에 없다

                                                                            이기철

                                                        (연재시 15/ 마지막 회)

 

형이상시편

 

 

 

책· 1

햇빛으로 모래를 끓이는 날

문득 나를 사로잡는 焚書에의 유혹

 


책·2

모든 책을 불태우고 난 뒤 시작되는

숨 쉬는 지혜

 


악보

쓰르라미 앞에서 너 얼마나 무색한가

인간이 만든 천 페이지의 악보여

 


지혜

이슬의 마음 아니면 아무도 정결을 말할 수 없고

동풍의 마음 아니면 아무도 지혜를 말할 수 없다

 


큰 지혜

새는 높은 둥지에 살아 바람을 잘 알고

땅은 낮은데 누워 흐르는 물을 가둔다

 


유년

물봉선 씨앗 터뜨릴 때

거기서 읽던 유년의 동화

 


耳順

이순의 그리움이란

명박골 가서 토끼똥 손으로 만지는 일

 


낮과 밤

풀 뜯는 송아지 눈에 낮달 비친 것보고

어미 소 두 뿔 사이에 초승달 걸린 것 본다

 


인간을 사랑하는 일보다

인간을 증오하는 일이 더 어렵다

 


시· 하나

시는 영혼의 정원을 거니는 산책이다

 


한낮

기다려라, 꿀을 찾아 떠난 별이 돌아올 때까지

 


그리움

천길 낭떠러지 끝에서 혼자 부르고 싶은 이름을

서슬 푸른 칼로 베는 마음

 


사랑

사랑이란 시든 혼에 물을 대는 작업이다.

      

 

 

 

사물시편

 

 

 

눈발

휘날려라

너의 육체가 물이 될 때까지

 


가시나무

깊이 찌를 수밖에

저를 지킬 길은 그것밖에 없으니

 


칼날

그의 꿈은 부러지기 전 한번은

생살 속을 깊이 파고드는 일

 


도서관

죽은 사람들의 입이

저렇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니

 


산이여 질주하는 일만 마리의 말잔등이여

백만 년을 달려왔으니 이제 너도 쉬고 싶겠구나

 


전인미답이라고 쓰지마라

사람들이 밟지 않은 길은 지상에 없느니

 


벌레집

영하 30도, 문고리가 얼어붙는 방에 앉아 생각한다

벌레여, 문이 없는 너의 집은 따뜻하겠구나

 


이슬

내 얼마나 맑아져야 너의 몸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닿으면 사라질 작은 우주여

 


얼음

얼음에 들어가려 했더니 얼음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솜이불 속에 들어왔네

내 몸이 더우니 얼음이 물이 될까 저어하네

 


빗방울

자주 떨어지지 않으면

누가 저의 존재를 알기나 하리

 


화살

꽂힐 데가 없어 날아간 살이어, 멈춤은 너의 죽음이다

가거라 너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정

자정에 산길을 걸어보았느냐

짐승을 재워놓고 나무들이 혼자 숨쉬는 소리 들어보았느냐

 


진딧물

이젠 얼굴을 내밀어라

방이 젖지 않았느냐

 


유리

피 가진 몸이여

어찌 살과 뼈 가리고 유리의 집을 짓겠느냐

 


별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별의 몸 속에 우리 마음 깊이 꽂을 수 있어야 한다

 


피는 꽃은 지는 꽃의 슬픔을 모른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슬픈 것이다

 


연서

흰 봉투를 뜯을 때마다

분수가 되는 푸른 영혼

 


나무· 1

나무의 불행을 알면 나는 붉은 잉크로 밑줄을 긋겠다

 


나무· 2

햇빛이 뜨거워지니 그늘이 깊어지네

 


나무· 3

내가 20세기의 참담함을 말할 때 나무는 21세기의 행복을 꿈꾼다

 


나무· 4

오래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나무 백성들, 저 오래고 긴 참음

 


산새

그렇게 많은 말을 지껄였으니 주둥이가 껍질처럼 딱딱해졌구나

 


귀뚜라미

지겹지도 않느냐 밤새 꼭 같은 노랠 부르고 내일 또 그 노랠 부르려면

 


질경이

무슨 원한이 있기에 황소 발굽에 밟히고도 돋아나는 목숨이냐

 


돌멩이· 1

돌멩이야, 얼마나 발길에 채였으면 그리도 단단한 몸이냐

 


돌멩이· 2

땡볕에 맨 몸으로 덤벼드는 돌, 그의 몸이 단단이 굳어지는 이유

 


식물들

농부는 안다. 낫을 들고 다가가면 식물들도 몸을 피한다는 것을

 


들판

수천마리 새떼의 비상으로 들판은 꽃을 피운다

 


경전으로 가는 길 서툴러 나는 절 밖 주점에 앉아 산만 보네

 


장미

저의 매혹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온몸에 가시 兵士로 무장한 저 장미  

 

                                         

                                                                                        -현대시학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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