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나

시계와 시계 사이 외

달그리매 2007. 8. 13. 16:58

 


 

 

                                                 문정희 시인

 

       노기 2007여름호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시인)

 

 

시계와 시계 사이 / 문정희(文貞姬)

 

 

이 아침 고장 난 시계 속에 눈을 뜬다
고장 난 시계가 이를 닦고
고장 난 시계가 밥을 먹고
고장 난 시계가 나이를 먹는다
그래도 어딘가 맞는 시계가 있으리라
나는 그런 시계를 하나 갖고 싶다
나는 CNN을 본다. CNN은 당황하여
고장 난 시계가 있는 곳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꼬리를 잘 흔들고 손을 싹싹 비비고 눈치를 살핀다
고장 난 시계에다 총구를 갖다 댄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을
대화라든가 외교라는 말로 보도한다
결국 모두가 제 힘으로 살다 가는 것
세상의 모든 시계를 똑같게 고칠 수는 없나 보다
너와 나 사이에는 어차피 시차가 있다
고장 난 시계로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서서 시계탑을 본다
나의 시계가 맞는지 교차로의 시계가 맞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시계는 나이가 없다
제각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손의 고백 / 문정희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弔燈이 있는 풍경 / 문정희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를 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 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 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 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문정희(文貞姬) 시인


 1947년 전라남도 보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졸업.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 취득. 미국 뉴욕대 대학원 객원 수학, 미국 아이오와대학(IWP)국제창작프로그램 참가 수료, 한국현대시 100주년 기념 미국 버클리대학 한국학 연구소에서 주최한 한국, 미국 대표시인포럼에 참가하는 등, 해외 시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고교 재학 시에 시집 꽃숨을 발간했고, 1969년 대학 재학 중에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1973년에 첫 시집 문정희시집을 시작으로  오라, 거짓 사랑아 남자를 위하여를 포함하여 총12권의 시집이 있으며, 영역시집 WINDFLOWER등이 있다. 또한 나비의 탄생 새떼 등 시극집과 창극집이 출간되어 주요 무대에서 성황리에 공연되었고, 산문집 사포의 첫사랑과 장시집 아우내의 새가 있다.
  그 외에도 방송사와 함께 다수의 해외취재 여행을 했는데, 인종 분쟁지역 스리랑카, 터어키, 카리브해의 도시들-맥시코, 자메이카 등을 취재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동국문학상> <천상병 시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문학상을 대부분 수상했다. 그리고 2004년에는 레바논에 본부를 둔(아랍어권)NAJI NAAMAN,S 재단이 수여하는 <NAJI NAAMAN,S 문학상>을 공동 수상했고,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시인포럼에서 <올해의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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