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나

자작나무 내 인생 외

달그리매 2007. 8. 13. 16:53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 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속은 서릿몸
    신경 줄까지 드러낸 헝큰 마음
    언 땅에 비켜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푸른수염고래 / 정끝별

     

     

    밤이 바다를 거슬러 높아질 때
    젖은 바다 날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수면 위로 부상하는 긴수염고래
    백 살 난 지느러미로 모래를 휘저으며
    불길 같은 꼬리로 바위를 후려치며
    불길 같은 꼬리로 바위를 후려치며
    긴 수염을 성난 바다의 목구멍에 밀어 넣어
    바다의 깊은 울음을 건져 올렸던가
    바다의 담벼락이 하늘 높이 일어서
    둥근 달을 베었던가 베어진 달이
    긴수염고래의 횡격막에 박혔던가
    긴 휘파람 소리가 폭죽처럼 치솟았던가
    긴수염고래의 푸른 핏줄기가
    �로 있는 떡갈나무 너머 새벽별로 부서졌던가
    낮아지는 수평선을 가르며 꼬리를 돌렸던가
    밤이 바다를 거슬러 높아질 때
    바다가 백 년을 품고 있던 긴수염고래를 내보냈다
    왜 빠르게 삼켜버렸는지는 비밀이다
    썰물이 진다 이제 또 한 꺼풀을 벗는 바다여
    청춘의 조난자로 하여금 울게 하라

    삼켜버렸기에 한없이 푸른 것들을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 정끝별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빡깜빡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퉁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통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정끝별(鄭クッピョル)
     

    1964년 나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 석,박사 졸업.
    1988년 문학사상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등이 있다.
    시론 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등이 있고, 산문집 행복시가 말을 걸어요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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