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어기적거리는, 엉성한, 눈을 흘기는 문체로 써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순하고 착한 노인은 못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독 짖는 늙은이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육신은 느리게 늙어가고 인생은 빨리 썩어간다. 아마 죽은 뒤에는 우울했던 해골도 이빨이 빠진 채 웃으리라. 이런 말도 아직은 혀 한 조각이 뭉쳐져 있어 하는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려든 것 같은 일상적 삶을 게요리전문점 수족관의 게들도 경험한다. 그들도 몸을 팔려고 대도시로 왔다. 누가 내 몸을 사서 분해하거나 해체해도 그 왕성한 식욕을 원망하지 않겠소! 게들은, 왕게든 털게든 대게든, 늠름하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는 자세로 수족관 유리 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지금은 바퀴들이 지나간다. 구름은 흘러오고 사람들은 흘러가고. 사람 외에는 보이는 영장류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끌려나온 뒤에 게는 일종의 괴상한 광물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도 없고 보는 자도 없고 도대체 뭐가 뭔지, 과거에 참으로 게였는지, 텅빈 껍데기가 현재인지, 미래는 이제 없는 건지, 이게 그 게 찌꺼기인지, 저게 그 게의 잔해인지, 모든 게 가짜인지 헛것인지 뒤죽박죽 너절하게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래도 靈을 믿었던 게는 다리가 없어도 어기적거리고, 눈이 없어도 가야 할 길을 보며, 마침내 바다로 돌아간다고 말해야 할까.
뼈의 음악
만약 늑골들이 현이었다면, 그리고 등뼈가 활이였다면, 바람은 하나의 등뼈로 여러개의 늑골들을 긁어매며 연주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막이라는 청중으로 꽉 찬 사막에서 뼈들의 마찰음과 울림은 죽은 늑대의 뼈나 말의 뼈와 공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적막이라는 청중의 마음을 깊이 긁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뼈의 음악은 그렇다 아무런 악보도없이 뼈로 뼈를 연주해 텅 빈 뼈들을 뒤 흔든다 청중으로는 적막이 제일이고 연주자로는 바람이 적합하다
*2006 '문학들' 겨울호
모자를 쓴 태양
칸나꽃 수만 송이를 토해내던 태양이
여기서는 돌덩어리를 굽고 있을 뿐이다
두개골이 뜨겁다
어딘가에 바삭바삭한 미라들이 있을 것이다
큰 모자를 쓰고 올 걸 그랬다
눈이 부시다
칸나!
태양에 바치는 숫처녀의 심장처럼
붉은 칸나를 본 게 지난 해 여름이었나
정말 장미와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싱싱한 심장 같은 꽃이었다
두근거리는 대지 위의 초목들과
나비들의 향기
그러나 이 물 마른 땅엔
번쩍거리며 누워있는 모래들이 있을 뿐이다
물을 벌떡벌떡 들이킨다
태양의 모자는 녹아버린 것 같다
지평선
1
어느 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사방에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지평선의 충격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득한 곳에 선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직선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커다란 선은 둥글었고
그 텅 빈 원 속에
원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텅 빈 원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사막의 태양
소리 없이 몰려와 지평선을 뭉개버리는 화산재 같은 구름들
2
지평선은 언제까지 지평선일까
가도 가도
원의 중심에 내가 있고
내가 가면 거대한 공허가 따라온다
3
여기가 무밭이었다면
사방이 무뿐인 어마어마한 무밭에서
내가 애벌레였다면
무잎을 갉아먹으며 나는 나비를 꿈꾸었을까
날마다 이 부에서 저 무로 꾸물꾸물 기어다니며
도대체 내가 무밭의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인지
눈 먼 애벌레인 나는 끝없이 펼쳐진 무밭을
그 무의 장관을 과연 상상하기나 했을까
밤이면 무꽃들 속으로 별들이 내려오고
별밭에 무꽃들이 흔들리는 어마어마한 무밭에서
내가 애벌레가 아니라
무밭의 주인이었다면
무재벌을 꿈꾸었을까
둘러보고 사방을 둘러봐도 무 하나 없다
배추 한 포기 없다
둥근 황무지는 울타리가 없다
가없는 곳에서 가없는 곳으로 바람 분다
서늘하다
지금은 고비의 5월
거울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요귀妖鬼지 사람이랴
거울공장 노동자들은
늘 남의 거울을 만들어놓고
거울 뒤편에서 주물呪物처럼 늙는다
구리거울을 만들던 어느 먼 시절의 남자를
훤히 비추던 보름달이
곰팡이도
녹도
이끼도 없이
빌딩 모서리 스모그 위로 솟고 있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것은 눈꺼풀이 없는 눈, 눈썹이 없는 눈, 눈동자가 없는 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마가 늘 깨어 있으려고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아무튼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 눈은 우리를 무심하게 보고 있다. 그 무심은 허공과 다르지 않다. 허공은 얼마나 큰 거울인가. 안과 밖, 앞과 뒤가 없는, 맑고 고요한 거울이 허공이다. 무수히 흘러가는 것과 절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명상하기 위해 인간은 거울을 만든 것이 아닐까?
흰 개
시베리안허스키는 아니었다
그날 나는 늙은 개를 따라가고 있었다
흰 털이 더러운
그 개는
북극 늑대의 혈통 같았다
며칠 굶주렸는지
쓰레기자루 앞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다른 음식쓰레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두툼한 외투 차림에 가방을 든 사람들이
직립보행하는 대도시의 아침
스모그가 태양과 함께 중천을 향하는 소음 속에서
앙상한 몸뚱이를 네 발로 떠받친 늙은 개는
꺼칠했고
핼쑥했고
고독했다
큰길가에서 벗어나
간혹 노숙자들이 해바리기를 하는 공원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는 그 떠돌이 개를 나는 따라가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까닭은 묻어두자
아무튼 그 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해야겠다
그날 나는 천지간에 자욱한 눈보라와
아무런 발자국이 없는 설원을 보고 있었다
백야에 눈이 크게 열리는
흰 올빼미도 상상하면서
진달래꽃
그동안 없었던 일이다
드디어 우리 동네에도 콜걸들이 쳐들어왔다
누가 보기에도 민망한
엉덩이며 젖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광고전단지들이 골목길에 뿌려진 것이다
실낙원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아이들은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간다
한눈을 팔면
등교길 동산에는
진달래꽃이 피었다
영원한 봄이 없는 줄 알지만
싸구려 매음굴에 우글거리는 음습한 욕정들을
저 동산으로 옮겨서
진달래꽃이나 철쭉꽃으로
벌겋게 피워봤으면……
그림자
등에 펜이 꽂힌 채
글을 쓰는 것은 아닌지,
물병좌 저쪽 무변(無邊)에
물안개처럼 일어선 그림자가 구부정하게
고개 돌려 나를 굽어볼 때
등 구부리고 밤의
백지 위에
뭔가를 뿜어내던 나도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본다.
큰 밤을 초라한 어둠으로
물들이는 것은 아닌지,
앙상한 손으로
백지 위에
오늘은 이렇게 쓴다,
등에 쟁기 박힌 하늘소가
별밭을 갈아엎는다, 라고.
흔 적
맑은 하늘에 비행기구름 두 줄
생겨났다 이내 사라진다.
'저 흔적을 남기려고 제트비행기가 날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믄요'
'비행기구름은 오래 가지 않나 보죠?'
'그러믄요. 그림자 얹는 하늘이니까요'
잠시 하늘 보던 시인과 농부는 다시 밭일을 한다.
호미 끝에 대가리 찍힌 지렁이가
갈 생각을 않고 몸을 뒤틀고 있다.
죄 없기가 이처럼 힘들다.
콩밭의 모기들이
대낮인데 목덜미를 쏘아댄다.
敵 없기가 이렇게 힘들다.
'아무하고나 싸우면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그러믄요, 헛것과 싸워도 흔적은 남지요'
가락동 수산물 시장
상자들거대한 내장을 메꾸기 위해트럭들이 온다
밤 열시 희디흰 상자마다 시체들이다
비린내는 코를 찌른다
거대한 내장의 냄새는 이런 것일까
물고기의 썩은 내장으로 뒤덮인 하수도의 악취가이런 것일까
바다에서 트럭들이 몰려온다
장의차 같은 트럭들이썩기 전에 썩기 전에 싱싱한 시체를 팔겠다고 얼음투성이 상자들을 싣고 온다
저것은 우럭 상자저것은 오징어 상자저 톱밥 상자는게들이 잔뜩 들어 있다
어떤 도살장에도 이렇게 활발한 칼놀림은 없다밤에도 칼들이힘찬 지느러미처럼 움직인다
거대한 인간의 내장을 메꾸기 위해장어 껍질 벗기기수조에 붉은 고무통에
장어들이 국수처럼 수북하다
가죽치마를 두른 남자는 칼을 들고 장어를 한 마리씩 도마 위에 솟은 못 앞으로 데려가서 대가리를 못에 박고긴 껍질을 잡아당겨 홀딱 벗긴다
그래도 두피는 붙어 있다
벗겨진 몸은 빨개도 못에 층층이 꿰이는 대가리들은 눈을 뜬 채 검게 번들거린다
살점은 알뜰하게 도려내진다
남는 것은피 흘리는 대가리와 기다란 뼈장어의 십자가에는 오직 높이 솟은 못 하나와 대가리와 긴 뼈가 있을 뿐이다
보리새우수염이 긴 보리새우들은 꼬부랑 할아버지마냥 죽어서 좌판 위에 나란히 모로 줄을 맞춰 누워 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보리새우는 등이 굽은 채고무통 얕은 물 속에서 숨쉰다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머뭇거리는 새우의 발걸음으로 앞으로 한 발, 뒤로 두 발,혹은 제자리걸음, 지금쯤바다 밑의 보리는 누렇게 익었을까, 보리새우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쯤바다 밑의 보리들은 물결칠까,이삭이 패었을까, 멍게 멍게는 가락동이 어딘지 알기나 하는 것일까
바다 밑 단풍철에 붉게 물든 주먹처럼 주먹처럼 주먹밥처럼 멍게는 있다
멍게는 해삼보다 헐값인 존재다 존재?가락동 시장에 무슨 존재가 있단 말인가
시어(詩語) 가게에서
수평선 900원
구름 500원
아지랑이 1000원
저녁 어스름 800원
길 300원
마음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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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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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詩語 가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좋은 시 쓰세요.
- 『시평』(2005,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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