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나

문태준 시모음

달그리매 2007. 9. 7. 19:56

    老母 /문태준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 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 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짧은 낮잠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잠자다 깬 새벽에
    아픈 어머니 생각이
    절박하다

     

    내 어릴 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헹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

     

    붉은 아궁이 앞에서
    조속조속 졸 때에도
    구들에서 굴뚝까지
    당신의 눈에
    불이 지나가고

     

    칠석이면
    두 손으로 곱게 빌던
    그 돌부처가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들어앉아서

     

    어느 생애에
    내가 당신에게
    목숨을 받지 않아서
    무정한 참빗이라도 될까

     

    어느 생애에야
    내 혀가
    그 돌 같은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목을 빼고 천천히
    울고, 울어서
    젖은 아침

     


     묽다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 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나무 다리 위에서 

     

    풀섶에는 둥근 둥지를 지어놓은 들쥐의 집이 있고
    나무 다리 아래에는 수초와 물고기의 집인 여울이 있다

     

    아아 집들은 뭉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높고 쓸쓸하고 흐른다

     

    나무 다리 위에서 나는 세월을 번역할 수 없고
    흘러간 세월을 얻을 수도 없다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내 눈에서 눈으로 여울이 흐르듯이
    한 근심에서 흘러오는 근심으로 힘겹게 재를 넘어서고 있다

     

     

    맷돌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회고적인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하늘 궁전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 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 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별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0) 2007.09.08
마흔살의 동화  (0) 2007.09.07
최승호 시모음  (0) 2007.09.07
숙영식딩  (0) 2007.09.05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0) 2007.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