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살의 동화
이기철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 오면
들판이든지 진흙 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묻는
산노루 되어 나는 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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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으로 읽는 현대시>
이기철의「마흔살의 동화」
성경의 창세기에 야곱의 꿈과 바로의 꿈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후에 프로이트는 꿈에 대해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꿈을 무의식의 표출로 보았으며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한 소망의 충족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꿈은 무의식의 메시지이며, 개인의 내부세계에 잠재하는 혼란스러운 각성(覺醒)을 꿈으로 자유롭게 변환시킨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꿈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 꿈은 일상생활과 호흡을 같이하며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한다. 「마흔살의 동화」만큼 여러 차례 읽어 본 시가 없을 정도로 나는 이 시를 수시로 애독한다. 내가 사십대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 시를 읽으면서 진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살아가는 동안 충족되지 못한 소망이 하나 둘이겠는가. 한번쯤, 당면한 현실에서 벗어나서 꿈속 같은 세계를 탐미하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이 시는 "먹고 사는 일 걱정되는" 마흔 살의 고착상태를 잠시나마 종식시켜 보려는 레퀴엠처럼 들린다. 각성의 눈을 뜨면 뛰어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있다. 늘상 “먹고 사는 일”로 조바심에 휩싸인 채 바깥 생활을 하다가 어두워진 골목길로 돌아오는 일상이 주는 권태로움은 견디기 힘든다. 억압에서의 해방은 活力이다. 산노루처럼 유연자적하게 산길을 걷다가 발길 닿는 모든 곳을 안식처로 여긴다면 사는데 있어서 조바심을 가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 나는 꿈을 잃어버린 연유로 엄청난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 숨이 꽉 막혔다. 암담했지만 방황도 못했고 칩거하지도 못했다. 그 기간 동안은 한마디로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마흔살의 동화에 그치지 않고 쉰살이고 예순살이고 항상 꿈꾸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타인의 아내와 꿈속에서 성교한 남자도 간음한 것으로 여긴단다. 그래도 나는 날마다 백일몽에 빠지고 싶다. 오늘 밤의 꿈에서 나는 이 시 속에 뛰어노는 산노루가 되어야 겠다.(박예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