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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신앙시의 현황과 문제점

달그리매 2006. 7. 22. 00:57

한국 기독교 신앙시의 현황과 문제점

 

 

                                       이향아 시인(2004년 02월 13일)


신앙시는 언어로 드리는 예배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예술인 시로서 완성되려면 목적의식이 과도하게 표출되어서는 안 되며, 여기에 신앙시의 어려움이 있다. 예배는 신도가 기도와 찬양과 감사를 공헌하는 의식으로서 신앙 행위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미국의 정통복음주의 목회자인 존 맥아더는 예배를 '최상의 존재에 표하는 경의, 즉 최상의 존재에게 존경과 경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행위'라고 말하였다.
'한국기독교 신앙시의 현황과 문제점'이라는 주제를 정하고 나서 제일 먼저 부딪히게 된 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100년의 역사를 가졌으므로 신앙시의 역사 또한 그와 비슷할 것이라는 것, 짧지 않은 기간의 신앙시 가운데 어떻게 대상과 범주를 정하여 연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기독교 시인 중에서 특별히 부각되어 온 시인들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경우 결과가 너무 진부한 반복이 될 수가 있다. 즉 지금까지 한국의 기독교 시인으로 윤동주, 박목월, 박두진, 김현승 등이 빈번하게 언급되어 왔다. 그것은 이들이 한국 시문학사상 확실한 획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으며, 모두 작고 시인이라는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작고 시인은 작고 시인이기 때문에 계속 활동을 진행하고 있어 변수를 안고 있는 현역시인에 비해 평가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기독시인 연구는 윤동주의 시가 지성적 신앙인의 수치심과 참회를 읊었다는 것, 박두진의 시가 창세기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찬양하였으며, 박목월이 신앙인의 겸허한 자기성찰을 아름다운 가락에 얹어 표현했다는 것, 그리고 김현승이 하나님께 순명하는 삶의 진실을 읊었다는 것을 각각 지적하고 있다.

발표자는 본고에서 작고 시인과 현역 시인 작품을 포괄하여, 한국기독교 신앙시의 현황은 어떠한가, 그리고 신앙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한다.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시 역시 각종 월간문예지(특히 기독교 신앙잡지), 일간신문, 동인지 등에 발표되어 왔다. 그리고 이들 작품들은 처음 어디에 어떻게 발표되었던 것이든 결국은 개인이 출판하는 시집에 수록되어 왔다. 따라서 발표자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신앙시를 발견하려 하는 것보다 시집으로 묶여 있는 작품들, 특히 신앙시집이라는 명목으로 출판된 시집을 텍스트로 삼았다.

그러나 신앙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에도 훌륭한 신앙시가 있으며, 신앙시라고 주장하는 작품 가운데도 그 질량이 신앙시에 미치지 못하는 시가 있을 수 있다. 발표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정하면서 종로서적에서 발간한 <믿음의 시선> 전 40권을 주요자료로 선정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으로 운영하는 출판사가 신앙시를 정리하려는 의도로 출판한 기획 시리즈이기 때문에 출판사 나름으로도 객관적 기준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종로서적에서는 1988년이래 1995년 7월까지 40권의 신앙시집을 간행했다. 발표자가 본고를 작성하면서 확인하게 된 것은, 믿음의 시선 40권은 모두 초판으로 끝났기 때문에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출판사는 신앙시를 정리해 보겠다는 일종의 사명의식으로 결손을 무릅쓰고 감행한 출판이었을 것이다.
또, 최근에 인터넷 사이트로 주목을 받고 있는 <문학의 즐거움>(www.poet.or.kr)에서 독립된 장르로 개설한 신앙시 항목을 검토하였다. 이 사이트에는 20여 시인의 신앙시가 50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500여 편이라고 정확한 편수를 말하지 않는 것은 필자가 조사한 작품 488 편 외에 상당량의 신앙시가 일반 시의 항목에 더 있을 것으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그밖에 기독시인들의 화사집<풀잎에 내리는 이슬처럼>(1989년에 한국크리스챤문학가협회가 주관하여 성서교재간행사에서 펴낸 신앙시집 장수철 외 43인 참여), 기독교 신앙시인 열두 사람들의 작품집 <새 예루살램의 노래>(1999. 양문각. 김석 외 11인) 등을 참고하였다.
필자는 한국 기독교 신앙시의 현황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고찰하고자 하며 그 유형을, '고백과 간구의 시', '감사와 찬양의 시', '풍자와 비판의 시', 분류하려고 한다. '고백과 간구의 시'는 경건과 묵상, '감사와 찬양'의 시는 헌신과 봉헌, 그리고 '풍자와 비판 시'는 사회 비판의 시를 각각 포함한다.

1. 신앙시의 유형

1) 고백과 간구의 시


한국기독교 신앙시 중에서 가장 많이 대할 수 있는 것이 고백(회개)과 간구의 시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절대자의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하게 죄를 고백하고 소원을 간청하는 것이 현실이다. 회개의 내용은 나태한 일상적 생활에 대한 죄책감, 미흡하고 불완전한 신앙심에 대한 자책, 기타 양심의 거울에 비친 크고 작은 잘못들이며, 간구의 내용은 속죄와 구원이 우선이지만, 각 개인의 상황에 따른 각종 청탁과 소원의 간구가 대부분이다. 매달려 '달라'고 간청하는 신앙의 태도는 한국 재래의 무속신앙의 잔재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달라'의 내용이 신앙시에서는 의외로 적다. 이 부류의 시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요청, 신앙의 증진에 대한 요청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인간의 평범한 욕망이 시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여과되고 증류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내가 입원하는 날 아침 / 병원을 나오면서 나는 / 하나님께 빌었다 / 거리의 인파 속에 밀려가면서 나는 / 하나님께 빌었다 / 그때 어디선가 싱그러운 바람이 / 얼굴에 가득 / 마음에 가득 불어왔다 / 태초의 말씀이었다 / 어느 먼 바다의 곶에서 소리치는 / 태초의 말씀이었다 / 육신의 내부 깊은 데에서 불어오는 / 태초의 말씀이었다 / 꾀복동이 어릴 때 영산강 기슭에서 / 모래성을 일등으로 쌓아올렸을 때 / 코와 눈에 와 닿던 바람이었다 / 아부지의 꾸중을 듣고 / 집을 뛰쳐나올 때 / 엄니의 손에 이끌려 / 집으로 돌아올 때 / 얼굴에 가득 마음에 가득 불어왔던 / 그 바람이었다 / 그러나 주여 / 태초의 말씀이시어 / 우리가 주께 기도 드리게 된 것을 / 감사하나이다 / 저는 죄 많은 인간이오나 / 저의 작은 아내를 주께 맡겨드린 것을 / 감사하나이다 / 어찌 저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나이까(후략)
- 최규창 <바람>에서

시인은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시인은 병든 아내가 입원하는 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있는가, 있으면 무엇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의 잘못이 병든 아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시인은 절대자에게 매달려 아내를 살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시인은 아내를 입원시키고 병원 문을 나오면서 아내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청원하는 대신, '저의 작은 아내를 주께 맡겨 드린'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우리는 이 시에서 아내의 생명을 맡기고 난 다음의 차분한 안도감, 크고 거룩한 이의 능력과 섭리를 믿기 때문에 아무 걱정도 없는 시인의 편안한 마음, 행복이라고 불러도 좋은 그런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우선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음을 감사하였으며 그분께 아내를 맡길 수 있음을 행복스러워하였다. 우리는 이 시에서 시인의 맑은 신앙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오오 하나님 / 오늘도 저는 원망했습니다 / 오늘도 저는 저주했습니다 / 오늘도 저는 간음했습니다 / 오늘도 저는 돌로 쳤습니다 / 오늘도 저는 울었습니다 / 오오 하나님 / 배우기로는 원망하지 말라 했는데 / 배우기로는 저주하지 말라 했는데 / 배우기로는 간음하지 말라 했는데 / 배우기로는 돌로 치지 말라 했는데 / 배우기로는 울지도 말라 했는데 / 오오 하나님 / 그러나 세상은 그러나 세상은 / 사람의 아들이라 합니다 / 죄의 아들이라 합니다 / 당신 뜻대로 하소서.
- 허형만 <간구의 기도> 전문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간이 범하고 있는 일상 생활을 연결하고 있다. '하나님'은 남을 원망하지 말고 저주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나 사람은 그렇지 못했음을, '하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했는데 사람은 죄가 있으면서도 남보다 먼저 돌로 치기를 즐겼음을, 믿으며 근심하지 말라 했는데도 쓸데없이 근심하여 울며 지내는 사람의 삶을 비교하면서 속죄를 원하는 것이다.
이에 시인은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면서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말은 시 <간구의 기도> 전 편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인 동시에 가장 큰 중량을 담고 있다. 어느 간구의 기도든지 그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는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일 것이다. 이것이 곧 신앙시로 하여금 신앙시가 될 수 있게 하는 원형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문을 나선다. / 먹고 마시는 것을 / 위하여 / 바쁜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는 / 이를 긍휼히 여기소서. / 집으로 돌아온다. / 하루를 / 몇 개의 은전과 바꾸고 / 지쳐서 어깨가 축 늘어져 / 문을 들어서는 / 이를 긍휼히 여기소서. / 주림도 갈증도 / 당신이 베풀어 주신 것 / 주여. / 우리의 출입이 / 당신으로 말미암아 /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것. / 당신이 열어 주심으로 / 문이 열리고 / 당신이 닫아주심으로 / 문이 닫기는 오늘의 / 우리들의 출입 / 설사 몇 푼의 은전으로 / 오늘과 바꾸는 / 이 / 측은한 출입 속에서도 / 우리들의 우편에서 / 그늘이 되고 / 우리들의 영혼을 / 지켜주소서. / 낮의 해가 / 우리를 상하지 말게 하고 / 밤의 달이 / 우리를 해치지 아니하도록 / 우리들의 영혼을 지켜 주소서/
- 박목월 <우리의 출입> 전문

시인은 지상의 삶이 왜소하고 누추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한 삶을 지탱하지 않을 수 없음을 처음부터 고백하고 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당신이 열어주시고 결국 당신이 닫으실 때까지 계속될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 돌아가는 그날까지 당신이 우리들의 우편에서 그늘이 되어 우리들의 영혼을 지켜주시라고 당부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한,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어떤 것도 우리를 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그는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하지 않고, 다만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만을 당부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이다. 대문을 나서거나 대문을 들어서거나 우리들은 유약하다. 하루하루 사는 일이 은전을 받고 당신을 배반하는 일의 계속이다. 그러나 시인은 긍휼한 자는 복이 있다는 성격의 기록을 기억하면서 측은히 여김을 받고 싶어한다. 이러한 간구가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알고 있지만 대상이 '하나님'이니까 믿고서 간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백하되 어떤 태도로 고백하는가, 무엇을 간구하는가에 따라서 고백과 간구의 시는 그 토운이 천차만별해진다.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 마비된 이목구비 / 그늘진 나의 모국어를 용서하소서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 한숨의 기도뿐인, 눈물뿐인 / 죄와 탄식뿐인 목소리 / 슬픈 짐승인 나의 목소리를 용서하소서. // 나의 거룩한 땅 / 새 예루살렘인 나의 조국이여. // 빛과 소금이게 하소서. / 생명의 떡이신 말씀이게 하소서.
- 김경수 <용서하소서> 전문

여기서 시인의 모국은 그리스도의 천국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시인은 이미 슬픈 짐승으로 길들여져 살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소망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일, 그리고 생명의 양식인 말씀으로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공표하고는 있지만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양심을 펼치지 못하였음을 '슬픈 짐승'이란 말에 담아서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시인은 '새 예루살렘인 나의 조국'의 모국어를 그늘지게 하고 있음을 용서받고 싶어한다. 세속적인 것을 구하거나, 절대자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백하기보다 통절한 자기 반성으로 절대자와의 거리를 좁혀 동화되고 싶은 소원을 담고 있다.

2) 감사와 찬양의 시
감사와 찬양의 시는 아무런 조건도 내세우지 않은 순수 찬양의 시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고 절대자의 영광을 찬양한다.
찬양의 대상은 절대자의 위업과 능력과 사랑이며, 찬양의 이유는 자신이 그 나라 백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거기 합당한 보답을 되돌려 보내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절대자에게 보답하는 가장 가까운 길은 감사와 찬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찬양은 믿는 자의 충일한 정신적 만족에서 출발하며, 그것은 어떤 타율적 요소도 개입되지 않은 자발적인 감동의 표출이다. 영광을 기리고 찬양하는 일은 대상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라야 가능하다. 감사와 찬양의 시는 '언어로 드리는 예배'인 신앙시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내용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야훼 / 내 주소의 본적 / 잠시 있으라고 하신 / 이 자리가 / 벧엘이려니 / 강남에서 세던 달이나 / 명동에서 따지던 별자리도 / 무익한 계산 / 당신 앞에서 / 하란도, 갈대아 우르도 / 쓸모 없는 땅 / 그곳의 삶도 / 허무한 경작 / 야훼 / 내 주소의 본적 / 분양해 주신 약속의 땅이 / 거기 있으니 / 저 상수리나무가 / 증거가 되리라 / 야훼 / 내 주소의 본적 / 밟는 땅의 정겨움. / 낯선 사람들의 눈초리 / 높은 빌딩의 위용도 / 두렵지 않으니 / 터전이란 이미 없었던 것. /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곳이 / 행복한 거처. / 이 자리를 떠나는 날 / 손으로 짓지 아니한 / 영원한 집이 있는 줄 아느니 / 길이 눈앞에 보이지 않고 / 모래 바람이 불어도 / 근심하지 않고 떠나리라 / 야훼 / 내 주소의 본적.
- 김상길 <벧엘> 전문

위의 시에는 당신께 소속된 백성임을 기뻐하는 시인의 마음을 읊고 있다. 우리들은 그 동안 얼마나 허무한 경작에 엎드려 있었던가? 분양 받은 약속의 땅이 있는데,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당신의 땅은 어디에 있어도 밟기에 즐겁고 정겹지 않겠는가.
시인은 '야훼'가 시인의 주소이며 본적이며 근원이며 뿌리임을 알고,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만 있으면 거기가 어디든지 행복한 거처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행여 목숨이 다하는 날 '당신'이 부르시면 시인은 '길이 눈앞에 보이지 않고 모래바람이 불어도 근심하지 않고 떠나리라'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감사와 찬양의 시에는 충만한 기쁨이 담겨 있다. 절대자인 '당신'과의 은밀한 약속을 가능하게 하고 삶의 목표와 질을 결정하는 계기를 만나게 한다.

육욕의 비늘 떨어내며 / 세상적인 슬픔 삼켜야 / 하늘의 신비 누릴 수 있다는 / 눈부신 약속 / 그건 비밀 비밀이어요. // 님이 빛나는 궁전에서 / 낮고 천한 나를 내려다보시며 / 달빛 묻은 / 내밀한 언어로 속삭여 주기에 / 그 신비 아는 이 없어요. // 오로지 이웃 위해 착하게 살라는 / 절절한 당신의 음성은 / 바람결에 돋아나는 세세한 울림이기에 / 화려한 의상 걸친 / 땅 위의 이들은 / 귀 기울여도 들을 수 없어요. // 시간 앞에 흔들리는 촛불도 / 별도 숨은 깊은 밤 / 터진 손등 위로 떨어지는 / 방울방울 은총 같은 눈물 / 죽음처럼 깊은 침묵 뒤 / 일순간 깨어나는 / 당신과의 신비한 약속 / 그건 하늘 가득 꽃눈으로 나리는 / 생명의 축복 / 온전한 천국의 황홀한 비밀이어요.
- 엄창섭 <눈부신 약속> 전문

시인은 마치 연인과의 약속처럼 은밀하고 황홀한 약속에 감격해 하고 있다.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고 흠모하는 한, 온 세상이 꽃눈의 축복에 싸여 있으며 온전한 천국의 황홀한 비밀에 차 있다고 말한다. 화려한 의상을 걸친, 신비한 존재인, 빛나는 궁전에서 나를 내려다보시는 '당신', 그는 아무도 모르는 내밀한 언어로 내게 속삭인다. 나는 그 사랑에 감읍하면서 은총 같은 눈물을 흘린다.
절대자의 영광을 찬양하고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이 뜨거워지면,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헌신과 봉헌, 이는 감사와 찬양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취한다. 절대자를 사랑하고 그 사랑의 기쁨을 감격적으로 표현하는 시, 신앙의 황홀경, 엑스타시를 표현하는 시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것은 독실한 신앙생활의 어느 정점에서 특수하게 체험하는 희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황홀의 그 순간을 경과한 다음 실제적인 작시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박두진의 다음과 같은 시가 여기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 튀는 /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 발톱과 손바닥과 심장에 생채기 진 /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 조롱의 짐승 소리도 이제는 노래 / 절벽에 거꾸러짐도 이제는 율동 /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
- 박두진 <당신의 사랑 앞에> 전문

시인은 온 마음과 몸을 봉헌하고도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첫행에서부터 당신의 말씀이 뜨거운 동공에 불꽃을 튀게 하여 자신의 시력을 밝힌다고 고백한다. 그는 성경의 기록에서 예수의 사적을 인용하면서, 우리들이 못박은 당신의 손바닥과 심장의 상처, 피 흘린 십자가의 골짜기를 생각하고 조용한 흐느낌 속에서 그 상처를 아물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박두진의 정서는 급박하고 표현도 격정적이다.
당신의 불꽃을 목구멍에 삼키고 채찍을 등뼈에 맞기를 갈망하면서 만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라보니'의 죽음을 조롱하던 짐승 같은 사람들의 소리도 노래로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라보니'를 위하여 절벽같이 위험한 곳에 거꾸러지라 해도 아름다운 율동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 불꽃을 삼킬 때 너무나 뜨거워 피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 피눈물은 시인의 영혼을 위한 화려한 고기 비늘이 되지 않겠는가고, 그 채찍을 받을 때 고통에 몸부림칠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시인의 영혼을 잠재우는 황홀한 안식이 되지 않겠는가고 반문한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은 모두 불붙는 몸짓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 예시하는 시처럼 경건하고 고요한 묵상으로도 가능하다. 어느 편을 택하느냐는 모두 시인의 체질과 성정에 맞물려 있을 것이다.

세모꼴 지도 위에 역등 켜지고 / 붉은 벽돌들 움츠리고 있었다. // 도금한 십자가 아래 검은 연보궤가 / 목이 긴 파이프 올갠 뒤로 / 어린 성가대 길어진 그림자가 // 검은 연미복 사제들 행진하다 돌아가고 // 강도상 위 샨데리아 역광 속에 / 목이 꺾여 베꼬니아 피어 있었다. // 마이크로폰 울던 마태 수난곡 지워지고 / 에텔린 하늘 저편에는 가마귀도 울고 있었다.
- 김석 <환상예배1> 전문

위의 시는 우리가 유년시절 처음 대하던 예배당의 추억을 담고 있다. '십자가', '연보궤', '성가대', '사제들', '강도상' '마태 수난곡' 등 예배당을 연상시키는 많은 도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시 특유의 인간 위축이나 과장된 죄의식에서 벗어나 있다.
조용하고 깨끗하며 어디선가 향내가 은은히 묻어날 것 같던 예배당의 추억이 높은 강도상과 샨데리야 불빛과 처음 보는 이국풍의 베꼬니아꽃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문화로 다가온다.
시인은 추억의 영상을 서술적 이미지로 그렸다. 그것이 어떻다는 해설을 전혀 첨부하지 않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한 장면 한 장면 묘사해 놓았다. 김석은 그의 시집 「환상예배」에서 이와 유사한 서술적이미지를 즐겨 원용하고 있다. 신앙시가 저지르기 쉬운 목적의식을 겉에 내걸지 않았다는 점에 이 시의 우수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시가 설득과 설교, 교훈 등의 내용만을 담아냈을 때, 시는 비대한 목적에 짓눌려서 아름다움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김석은 시로서의 완성을 지향하면서 향기 높은 작품을 쓰는 데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3) 고발과 풍자, 비판의 시

풍자와 비판의 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세상을 고발하고 풍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와 신도와 자신을 고발하고 풍자한 것이다.
세상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의 저변에는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깔고 있다. 굳이 풍자시가 아니더라도, 시에서 표현되는 현실은 대부분 안주할 낙원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현실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현실보다 나은 이상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 시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신앙시일 때, 현실의 양상이 절망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은 절망의 대응책으로서 눈앞의 현실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말세의 표징이라고 탄식하면서, 한 편으로는 현실을 체념하고 또 한 편으로는 용납하기도 하는 가운데 극복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건 그것을 시로서 나타내려면 현실 그대로 노출할 수는 없다. 여기에 비유와 상징이 따르게 된다.

소돔 왕이 다스리던 소돔 성에는 / 통금이 있었다 / 통금이 소돔의 4대문을 가로막는 / 소돔의 밤 12시는 / 북악터널에서 멎어 / 소돔의 의인들은 북악터널을 사이에 두고 / 삼각산에서 인왕산, 도봉산, 우이동 계곡 / 혹은 십자가가 핏발을 세우고 지켜선 교회당에서 / 경야(經夜)를 하곤 했었다 / 소돔의 왕이 / 10월 하순 어느 심야에 / 몇 발의 총성으로 죽은 후 / 소돔에는 자율화와 함께 통금이 풀리고 / 그 무렵 / 의인들이 경야하던 기도원들이 / 하나 둘 그린벨트에 꽁꽁 묶여서 / 로마 병정들에게 / 연행되기 시작했다 / 얼마만큼의 시간이 경과되고 / 몇 개의 긴급조치가 그 시간을 추월한 후 / 의인들의 그림자는 / 소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 김대구 <어떤 그림자> (창 19:2) 전문

우리들이 건너온 어두운 역사를 멸망한 도시 소돔에 비유하면서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한 시다. 북악터널, 인왕산, 도봉산, 우이동 계곡 등의 지명이 소돔이라는 이름 위에 오버랩되어 있다.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소돔은 어디인가? 로마병사는 누구이며 소돔의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 '긴급조치'니 '10월 하순 어느 심야에 울린 몇 발의 총성'이니 하는 말로 미루어 시인이 말하고 싶어하는 사건이 무엇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김대구의 이 시가 수록된 시집 <어둠을 헤매며>는 1989년에 발간된 것으로 아직은 이런 말을 마음놓고 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을 텐데 이 시인은 용기 있게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 풍자의 대상이 다름 아닌 우리 신자들이고 우리의 교회일 때 그 아픔은 예사롭지 못하고 심각하다.

-전략-
선교 일백 주년에 / 불어난 교인의 수를 자랑만 하기엔 / 내용이 너무도 비어 있습니다. / 예배당은 가게방만큼씩이나 많지만 발붙이고 들어설 데가 없을 지경입니다. // 구호를 받아야 할 가난한 이웃들이 이 지구촌에는 수없이 많건만 /
(중략) / 직분을 맡아 양 무리의 가난한 돈을/ 긁어 쥐고 부도를 내고 달아난 / 장로님, 집사님들 어쩌자는 겁니까. // 교인의 수는 늘어도 새 결신자는 극히 적고, / 이명 교인으로 예배당을 채우고 흐믓해 하는 당회장님은 또 무엇입니까. / 교인이 교인을 불신하고, 장로가 목사를, / 목사가 장로를 상호 불신하고도 /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옵니다. (중략)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울어도 아직 부족한 데가 있어도 / 주님의 우심은 세 번만으로 완성하셨습니다. / 네 번 우셔서는 아니 됩니다.
-고진숙 <주님의 우심>중에서

예배당 수는 많아져도 아무 실속이 없는 허상임을 고발한다. 구호해야 할 가난한 이웃들을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돈을 긁어 쥐고서 부도를 내고 달아난 소위 신앙의 지도자들, 교인들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우리가 통곡할지언정 주님, '주님의 우심은 세 번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네 번 우셔서는 아니 됩니다'고 시인은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시대를 풍자하기는 오히려 쉽다. 그러나 우리들이 소속되어 있는 신자의 집단을 풍자하고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를 풍자하는 데에는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너는 무엇이냐' 비난의 화살이 날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미루고 피해 가는 것은 이 시대의, 믿는 자들의 비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풍자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바라볼 옷자락도 없는 시대에 / 이미 안 보이는 야훼의 옷자락을 / 생각하는 우리들 // 야훼의 옷자락에 / 손대는 여인도 없는 여인 속에서 / 그때 그 여인의 손을 / 그리워하는 우리들 // 그 옷자락도 / 옷자락에 손대는 여인도 / 하나 없는 오늘 / 우리는 골방에 모여 앉아 / 목청껏 목청껏 야훼를 부른다 // 카타콤도 아닌 지하실 방에서 / 카타콤이 없어도 되는 시대에 / 야훼를 부르는 야훼만 부르는 / 우리는 무엇일까 / 보다 자유로움 속에서 / 보다 자유케하는 자를 / 기다림은 애타게 기다림은 / 참말 참말 무엇일까
- 김지향 <무엇일까> 전문

야훼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소망이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성경 속의 여인들을 그리워한다. 우리들은 겨우 골방에나 모여 앉아 야훼를 부르지만, 야훼는 응답이 없다. 그 옷자락을 만지고 싶으나 우리들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옛날 지하 예배실인 카타콤, 손가락으로 손톱으로 파낸 지하 수십 미터의 예배 땅굴 카타콤. 비밀 예배실이 없어도 되는 자유로운 시대의 '우리는 무엇일가', '참말 참말 무엇일까'라는 절망적 목소리가 처절하게 우리들 가슴에 와 박힌다. 신앙심이 변질되고 퇴색해 가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들을 고발하고 풍자하는 시이다.
고발하고 풍자하되 이 시대나 이 시대 속의 공동체인 '우리'나 '교회'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을 풍자하는 시도 있다.

언제고 나는 / 정작 자유롭지 못하옵니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란 / 그 말씀만은 자유이옵니다. / 오늘도 나는 그 자유가 그리워 / 알맞게 세상을 떠도는 눈먼 하루살이이옵니다.
- 최은하 <황혼에 서서> 전문

당신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쟎아요. 그런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신 그 말씀만 자유일 뿐, 나는 정작 자유롭지 못하다고, 적당히 세상을 방랑하면서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선악을 구별 못하는 눈 먼 하루살이같이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시인은 자신을 고발하되 마치 응석이라도 부리며 투덜거리듯이 말하고 있다.
위선이 없는 목소리가 너무나 솔직하여서 슬프게 들린다. 최상의 대상을 우러러 존경하되 어려워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례하지도 않게 자신의 허술함을 토로한다. 이런 시는 과장이 없다는 점, 자기 부정을 통한 강렬한 긍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 정직하다는 점에서 진솔한 감동을 줄 수가 있다.
발표자는 이상에서 한국 신앙시의 현황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들 신앙시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문제점을 정확히 캐내어 정리한다면 이상적이고 발전적인 미래의 신앙시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신앙시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시는 처음부터 커다란 약점을 안고 출발한다.
그것은 아무리 훌륭한 신앙시라도 성경의 문학성을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리듬이 있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경의 비유와 상징은 아주 훌륭한 문학성을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흔히 세상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을 잘 한다'고 한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습득한 언어들이 고결한 성경의 어휘이기 때문이며, 은연중 성경 문장의 리듬을 익히고 그 은유와 상징성에 길들어졌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성경과 찬송가를 통해서 수준 높은 문학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시를 잘못 썼을 경우 우리들은 차라리 쓰지 않음만 못한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 잘못 쓴 신앙시는 보통 교인이 드리는 소박한 기도문보다도 감동이 약할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어떤 신앙시는 찬송가의 가사가 표현한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며 시편이나 아가서의 표현을 따라갈 수 없는 애정시가 부지기수다.
신앙시에 대한 일반적 선입견은 좋지가 않다. 밖에서는 신앙시를, 기독교인들이 저희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아전인수격의 자기들만의 방언을 읊어낸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 기독교인들끼리의 말 잔치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전 국민,인류의 범주로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발표자는 이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기독교인끼리의 방언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고,
둘째는 기독교 진리를 보편적 진리로 확대하여 표현하자는 것이며,
세째는 생 체험을 발효시켜 표현하자는 것이다.

첫째 기독교인끼리의 방언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은 비기독교인들이 읽어서 무슨 말인지 모를 어휘를 빈번하게 활용하는 것은 신앙시로서 오히려 좋지 않다는 것이다.

(전략)
롯이 딸과 동거를 하며 / 이어온 생명의 연체들의 아픔을 /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어 / 허허 벌판에 서서
유다의 바람을 안고 사는 것을 //
분노의 함성이 예루살렘으로부터 / 울리던 날 / 무거운 십자가 위에 다 이루었다 / 말을 들었으리라 //
돌 위에 돌 하나도 / 남김없이 녹아 버린 / 그 날을 안은 사해여! //
역사 속에 발을 담그며 / 주님께서 약속하신 날엔 / 사해에 고기가 뛰놀리라
(XXX <서해 바다에 누워> 중에서

신앙시에 교회의 행사나 성경에 기록된 사실이 없으면 신앙시로서 결격인 것처럼 생각하는 고식적 의식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사실을 아무런 여과 장치도 없이 그대로 쓰는 것은 시 이전의 설교로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시는 언어로 드리는 예배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언어예술인 시로서의 면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라는 한정된 울타리를 넘어서 보편적이며 범인류적인 감동의 시,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향기를 은연중 뿜어낼 수 있는 시여야 한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자기들끼리만 읽고 자기들끼리만 좋다고 하는 시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침투하여 감화를 줄 수 있는 시가 이상적인 신앙시이다. 그러기 위해서 신앙시는 우선 한정된 소재의 범주를 벗어나야 한다.

둘째, 기독교의 진리를 보편적 진리로 담아내자는 것,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위의 첫째 조항과 상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시는 같은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조금도 꺼릴 것 없는 부활의 기쁨을 읊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즐기는 기독교인을 위한 기독교인의 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주님은 두 강도 사이에서 그 강도들처럼 / 십자가에 못 박혀 심히 괴로워하면서 죽으셨습니다 /
그리고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 허망한 날은 하루 이틀 지나가고 / 제 삼일 아침에 / 남정네는 두려워서 / 초상집 예의도 못 차리고 / 여인들만이 고인의 시신에 / 마지막 사랑을 부어드리려고 / 향유 병(香油 屛)안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 그런데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무덤에는 / 수의만 놓여 있었습니다 / 그 후로 주님은 40일 동안 계시면서 제자들을 / 격려하시고 가르치시다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 감람산에서 공개적으로 승천하셨습니다. / 이로써 사망 권세는 깨어지고 말았으며 / 성도에게는 영생과 부활의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 <주님의 부활> 중에서)

불교시인인 한용운은 1920년대 암흑기에 승려요 애국자요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한국문학사에 우뚝 솟은 시인이 된 것은 그가 불교의 이념을 소화하여 보편적 진리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석가모니'니 '나무관세음보살'이니 하는 말 대신,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은 영원의 님', 그리고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님이 석가가 아니고 잃어버린 조국이라는 해설이 있지만 말이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88편의 시에서 거의 애정시로 일관하였지만 독자들은 누구나 한용운이 불교시인이라는 것, 그의 시에는 불교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런 시야말로 진실로 대중 속에 보편적 진리로 깊이 파고든 신앙시가 아닐 수 없다.
가톨릭 수녀인 이해인 역시 보편적 진리의 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그가 수녀로서 사랑의 시를 발표하였지만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랑의 대상이 마리아 혹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과제인 사랑, 증오, 이별, 죽음, 질투와 연민을 표현하였지만 시인의 특수성으로 표현의 아름다움을 궁구하면 독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세째는 생 체험을 발효시켜 표현하자는 것이다. 날것을 익혀서 표현하자는 것은 표현 기술상의 문제다.
발표자는 위에서 성경과 찬송가는 문학수준이 높으며, 어떤 기도문은 한 편의 시보다 순화된 내용일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신앙시니까 주여, 주여, 아멘, 천국, 부활, 영혼, 승천, 부활 등의 말이나 반복하면서 성경의 지명과 인명을 써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지식과 신앙의 돈독함을 과시한다면, 굳이 언어예술인 시로서 표현해야 할 까닭이 없다.

자신이 하나님이면서 / 자기 몸을 버리시고 / 사람이 되셔서 / 사람을 위해 / 그저 말없이
사랑하는 이들의 죄를 위해 / 죽어주시니 / 그 죽음이 고귀하건만 / 그저 죽음으로 마치시지 않고 / 죽어가는 인생에게 / 영생을 주시려 / 사망을 이기고 / 부활의 생명으로 / 무덤 돌 밀쳐 내시고 / 찬란한 광채로 / 일어나신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 영생에로 초대하시는 / 저 찬란한 광채를 보나이다.
- 000 <부활의 새벽에> 전문

시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주의나 주장이 아니라 리듬이다. 그것은 예술이 추구하는 것이 내용이 아닌 형식이라는 점과 일치한다. 신앙생활을 통한 실제적인 체험을 용해하여 표현하는 능력, 이것이 완숙하고 수준 높은 신앙시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부활의 새벽에>는 내용 중심의 글이다. 그대로 행과 연을 허물어 이어 쓰면 산문이 된다. 산문적인 말을 다만 연을 나누고 행을 바꾸어 정돈하였을 뿐 행간의 비약이나, 함축, 비유가 보이지 않는다. 구태여 시의 형태로 쓸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발표자는 이번 일을 계기로 문학성이 높고 감동적인 신앙시들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커다란 기쁨이었고 수확이었다. 그러나 신앙시의 문제점만을 이상의 세 가지로 간추려 제시하고, 이상적인 신앙시의 구체적인 예증을 뒤로 미루었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신앙시다'라고 지적하는 것도 의외의 도그마를 만들 위험성이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의 양상은 인류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뻗어가야 하며, 신앙시의 미개척지는 요원하고 광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