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에지야

시인과의 대화

달그리매 2006. 7. 23. 18:21

시인과의 대화 / 이시영-나희덕

 

 

나희덕 시인편 <어두워 진다는 것>


이시영 : 오늘의 초대 손님이신 나희덕 시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89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지금까지 『뿌리에게』외에 네 권의 시집을 냈으며 98년에 김수영문학상, 2001년에 김달진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3년에 현대문학상 등 다채로운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는 중견시인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분의 초대 손님은 나희덕 시의 세계를 여러분들에게 안내해줄 비평가 김수이 선생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김수이 선생은 현재 경희대학교 교양학부 강의전임교수로 계십니다. 두 권의 평론집을 간행했는데 2000년에 『환각의 칼날』, 2002년에 『풍경 속의 빈 곳』을 냈습니다.

유종호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문학은 연구실 속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읽어서 재생산하는 것"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좌담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정남영이라는 시 비평가는 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언어는 포함하고 머금으면서도 가두지 않고 열어 펼치는 힘이 있고 열린 곳에서도 만나게 하는 힘이 있으며, 만나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힘을 애초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의 작은 시 읽기 시간이 그런 유효하고도 즉각적인 의미의 재생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초대 손님으로 나와 비평을 해주실 분도 그러하시겠지만, 이 자리의 주인이신 여러분도 시인의 생산품 중 언제나 최상의 성취를 보인 작품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어느 자리에선가 "생물 비평"이란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비평이란 의미가 되겠죠. 특히 시작품의 경우에 산문문학과는 달리 추상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비평가였던 리비스는 "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예감을 인간에게 형성시키는 일이다"고 말한 적이 있죠. 비평가 김수이 선생 얘기를 듣기 전에, 제가 농담 삼아 나희덕 선생한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나희덕 선생은 작년 가을『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시론집을 간행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비평가가 아니다. 그러나 내 속의 시인은 내 속에 사는 비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시를 읽거나 쓰는 동안 그 둘은 줄곧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어 왔다"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여기에 "시인"으로 나오신 거 맞죠? 그런데 막상 시를 쓸 때 "내 속에 사는 비평가"가 어느 정도 간섭을 하는 것인지 재미있는 질문을 한번 드리는 것으로 시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안의 비평가가 몇 퍼센트나 간섭을 하던가요?

나희덕 : 지금 읽어주신 부분은, 시인이면서 비평적인 글을 모아 책을 내려고 하니까 뭔가 변명이 필요했거든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글을 쓰고 책을 묶는가 하는 자기 질문을 하면서 뒤늦게 내 안에 비평적인 자아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것이 내 시쓰기에 상당히 오랫동안 친구처럼, 혹은 두 개의 바퀴처럼 굴러왔었구나 생각해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리고 몇 퍼센트나 비평가가 내 안의 시인을 간섭하냐고 하면, 그건 시마다 다른 것 같아요. 대체로 제 시를 안정되고 균형 잡힌 시로 이야기 하시는 건 아마도 다른 분이 읽으실 때는 비평적 자아가 상당히 작용을 한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제 자신은 시를 쓰는 순간에는 거의 그 비평가가 간섭을 한다거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한 편의 시를 쓰기 전까지 오랫동안 삭히고 되새김질 하는 사유과정에서 비평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시를 쓴 다음에 그것을 활자화해서 발표할 때 문학적인 기준에서 쳐내고 정리하는 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분업인 것 같아요.

이시영 : 퇴고도 많이 하십니까.

나희덕 : 저는 시를 즉흥적으로 쓰는 경향이 못 되고 한 2년 있다가 혹은 5년 있다가 시가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대체로 한 편의 시가 돼서 나올 때는 안에서 이미 구조를 갖추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경우가 많죠. 퇴고를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오히려 한 편의 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내적인 과정이 긴 것 같아요.

이시영 : 네. 답변해주신 것으로 알고 김수이 선생의 소감을 듣는 것으로 이어가겠습니다.

김수이 : 평론가들이 가지고 있는 강박 중에 하나가 어떤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 설명할 때 뭔가 전체적인 구도를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두워진다는 것』, 저는 이 시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제가 생각하는 나희덕 시인의 전체 세계, 나희덕 시인이 최근 우리 문단에서 갖고 있는 지점, 이런 것들을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드리고, 저도 한 사람의 개인적인 독자로서 기쁘게 참여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나희덕 시인은 여성시인들 가운데 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따져보면 여성시인들의 목소리가 문단에 전면으로 떠오른 시기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여성시인들이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어떤 경향들을 형성하고 하는 것은 80년대 이후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80년대, 90년대의 대략 20여년 정도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의 역사나 문학사가 남성 중심의 역사이고 문학사였기 때문에 일단 처음의 여성들은 그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적인 역사와 문학사를 비판하고, 잃어버린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에 많은 힘을 바쳐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는 김승희나 김언희 같은 경우는 여성의 목소리를 굉장히 비판적이고 도발적이고 투쟁적인 목소리를 내왔다고 생각이 되구요. 또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 무의식까지 내려가서 여성들의 억압이 단지 외형적인 현실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감성과 욕망과 무의식까지를 왜곡해왔다, 그래서 그런 분열된 의식을 드러내는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그것이 아마 최승자나 박서원이나 성미정 같은 분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한 쪽에서는 긍정적인 출구를 좀 찾아보자 하는 것으로 환상의 영역, 상상력의 영역에서 찾는 시도들이 김혜순이나 이수명 시에 등장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비슷한 차원이긴 하지만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세계, 신화적인 뿌리에서 여성성의 목소리를 읽어내고자 하는, 서정적이면서도 서사적인 모험을 시도하는 것이 최근에 많이 각광받고 있는 김선우 시인을 통해서 등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이 외에도 사소한 어떤 일상에 대해서 여성들이 갖고 있는 특별하고 세밀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시도들이 이진명이나 이선영 같은 시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그러면 나희덕 시인은 어디에 속하는가,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에 대해서 두 편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어두워진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고, 최근에 나온 시들을 중심으로 쓴 글이 있습니다. 제가 "나희덕론"을 쓰면서 굉장히 고민이 되었는데, 그것은 왜 그러냐면 어떤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평론가들이 글을 쓰기가 쉽습니다. 이를테면 이상 같은 경우는 글을 쓰기가 쉬운 경우에 속합니다. 상당히 어려워 보이지만 오히려 반대로 아주 특이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승호나 황지우 이런 시인들의 시도 그런 대표적인 경우가 되겠죠. 그런데 나희덕 시인의 시에서는 어떤 특별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데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제목을 붙여도 말이 되지만 동시에 어떠한 제목도 나희덕 시인의 본질을 한마디로 명쾌하게 꺼낼 수 있는 말들을 발견하기가 저로서는 어려웠습니다. 기존의 평론가들이 "단정한 기억"이라든가, 아니면 "따뜻한 모성성"이라든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러한 말들도 최선의 말들이 아니라 차선책이라는 말이 되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저로서도 지금도 계속 질문하고 있는 부분이고 또 이 점과 관련해서 저도 오늘 나희덕 시인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나희덕 시를 읽는 가장 좋은 통로 중의 하나는 나희덕 시인의 시에 보면 자연물에 대한 비유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 것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읽으면 언뜻 보기에 자연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자연 자체에 대해서 노래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 말은 자연물을 빌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곧 삶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고 존재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아마도 나희덕 시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세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모든 시인들에게 공통된 문제일 것이지만 나희덕 시인이 제기하는 다양한 일상의 문제들, 삶의 고뇌들, 타자와의 문제들, 이 속에서도 결국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어떤 자세로 존재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 제 생각이고 그런 자세가 가장 특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이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나희덕 시인이 생각하는 존재의 자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이고 그런 존재가 가장 본질적인 자세를 취해주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체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거죠. 동시에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세 그 자체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시 「어두워진다는 것」의 부분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ř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이 시가 마치 어두워지고 있는 시간 자체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그 어두워지고 있는 시간을 하나하나 온전히 체험하면서 어떠한 존재의 자세로 서 있을 것인가, 어떠한 존재의 자세로 삶을 대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많은 평론가들이 나희덕 시의 본질이라고 지적하는 여성성 혹은 모성성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여성성, 모성성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광범위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제가 나름대로 이번에 이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나희덕 시인에게 있어서 여성성, 모성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에 대한 것이냐 하면 삶을 견디는 일의 고통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삶을 견디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고 있고, 그 고통의 강도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벅찰 때가 많이 있고 부담스럽기도 하죠. 그 시인이 아무래도 뭔가 고통에 대해서 과장하는 것 같고 그 고통에 대해서 엄살을 떨거나 호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우리의 감동은 줄어들게 되죠. 그런데 나희덕 시인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고통스러운데도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는 것,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운데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는 것조차도 하나의 소란이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을 견디는 일의 고통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삶의 어떠한 고통도 견디어 왔고 앞으로 생겨날 어떠한 고통도 견디어나갈 것이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거죠. 견딜 수 있어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견디어 나가고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열어놓고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할 때는 나희덕 시인의 여성성, 모성성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자연 자체를 노래하는 법이 없지만 끊임없이 자연물을 빌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노래하고 있는데요, 그 자연하고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자연은 인간하고 많이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가까이 있다고 했을 때 그 가까운 자연은 사실 인공의 자연이거나 아니면 구획된 자연이거나 그렇습니다. 자연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 아니죠. 평론가 도정일 선생님은 그 얘기를 이제 "우리 시대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그리고 숲으로 가도 그것은 더 이상 숲이 아니다"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조금 바꾸어서 나희덕 시인의 경우에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숲으로 가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그 숲에 대해서 상상하고 꿈꾸는 바로 인간 자체를 보존한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으로 일부러 가까이 가지 않음으로 해서 숲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보존한다는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생태시하고 관련을 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생태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생태시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일부러 자연에 대한 거리를 두어서 인간을 보존하는, 그 따뜻한 마음을 보존하는가로 바꾸는 것이 바로 이 시집의 첫번째 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라는 시입니다. 그 부분을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섰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시인은 복숭아나무가 있고 복숭아나무가 너무 아름다우면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게 우리가 보통 시인이 자연과 갖는 거리, 그 거리를 無로 만들어서 내가 곧 복숭아나무가 되는 경지, 이것이 바로 서정시의 최고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시대에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나희덕 시인은 오히려 그 거리를 떨어뜨려놓음으로써, 그 복숭아나무에 대한 상상력의 여지를 만들어놓고 그 사이에 아름다움이 생겨나게 하고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있는 바로 시인 자신의 마음, 인간의 마음을 보존하려고 하는 노력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비슷한 예가 「저 숲에 누가 있다」라고 하는 시에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무 열매가 떨어지고 있는데 나무 열매가 떨어지고 있는 숲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어둠으로 꽉 찬 가을숲에서/ 밤새 제 열매를 던지고 있는 그의 얼굴을/ 끝내 보지 않아도 좋으리"

가서 보고 확인하고 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떨어뜨려놓음으로써 미학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죠. 그래서 적극적으로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이 생겨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나희덕 시인이 자연과 관계를 맺는 그런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시에서의 서정적인 주체와 그 주체가 경험하고 존재하는 세계와의 관계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희덕 시에서의 서정적인 주체는 우리가 기존의 정통 서정시에서 보는 것처럼 세계와 합일하는 것도 아니고 모더니즘 시에서 보는 것처럼 단절과 분열과 갈등을 노래하는 그러한 상태도 아닌, 그 둘 사이를 다 오가면서 아름다운 거리, 인간적인 거리,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예는 또 「새를 삼킨 나무」라는 시로도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집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시이기도 한데요. 그 시의 마지막 연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 새 나무 그늘에 아무리 앉아 있어도/ 끝내 나를 삼켜주지는 않고/ 어둠만 어둠만 밀려와/ 닫혀진 문 앞에서 나 오래도록 서성거리고"

"새 나무 그늘", 이것이 바로 자연이겠죠. 혹은 나희덕 시인이 생각하는 본질적으로 완전한 어떤 것일 텐데요. 그 앞에서 아무리 오래 앉아 있지만 그 속에 삼켜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그 속에서 어두워져만 가고 있는 것, 이것이 이 시집에서 나희덕 시인이 서 있는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희덕 시인은 자연 대 인간의 관계학, 자기 자신의 존재론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예전에 써놓은 글이 있어서 그 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자연의 품에 새처럼 삼켜지고 싶지만 끝내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나희덕이 통찰하는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의 슬픈 운명이다.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을 흠뻑 물들인 "어둠"은 이 운명에 대한 나희덕의 예민하고도 풍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어둠"은 그녀와 이 시대를 사는 자연과 분리된 존재들의 내면을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나희덕의 "어둠"은 실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체를 보존하고 신비롭게 감싸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나희덕의 "어둠의 존재론"은 이처럼 화해로운 의미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 어둠은 자연과 인간, 대상과 주체의 접촉 가능한 거리를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낸다. 이 한계가 나희덕 개인에게 한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을 분리시킨 우리 시대의 한계라는 점은 함께 언급되어야 할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제가 나희덕의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감각의 문제입니다. 제 두 번째 평론집의 제목도 『풍경 속의 빈 곳』입니다. 풍경 속에 깃들어 있는 비어 있는 곳이죠. 제 나름대로 생각할 때는 사실 우리 문단의 유행어 중에 하나가 "풍경"이잖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풍경은 시각의 산물입니다. 그러면 풍경 앞에서 사실 다른 감각들은 설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 비어 있는 곳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감각들이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나희덕 시인의 시에는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평론가 유성호씨도 청각이 굉장히 많이 살아있다고 얘기를 했는데요. 청각뿐만 아니라 후각, 촉각, 미각 이런 전존재적인 감각을 시에 두루 자산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를테면 또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저 숲에 누가 있다」라고 하는 시를 다시 보겠습니다.

"열매는 번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무가 말을 하고 싶은 때를 위해 지어졌다는 것을/타다닥…따악…톡…따르르/ 무언가 짧게 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박수 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들은 무슨 냄새처럼 나를 숲으로 불러들인다"

그 다음에 하나만 더 예를 들면 「빗방울, 빗방울」이라고 하는 시가 있습니다. 버스 유리창에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데요.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어둠이 빗물을 삼키는 감각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리가레이라고 하는 여성주의학자는 남성문화는 시각을 강조한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여성들은 촉각, 혹은 후각, 이런 것에 더 자극을 받는다고 해요. 더 나아가서 여성들은 전존재적인 감각을 발휘하는 육감에 훨씬 남성들보다 탁월하다고 하죠. 그런 차원에서 여성 시인들의 시를 가만히 살펴보면 남성 시인들의 시보다 훨씬 다양한 감각을 본능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도발적인 목소리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낮고 부드럽고 고요한 목소리로 전해주는 것이 나희덕 시의 또 하나의 미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시영 : 고맙습니다. 아주 꼼꼼하게 정리해주셨는데요. 제일 인상에 남는 말은 역시 도정일 선생님의 평론집 제목을 패러디해서 나희덕 시인의 시세계를 "시인은 일부러 숲으로 가지 않는다", "일부러"라는 말을 쓰셨어요. 나희덕 시인의 시세계를 여성성이라거나 모성성에 한정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과의 거리두기로 보셨습니다. 왜 이 시인이 자연과의 거리두기를 하고 있냐면, 인간적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연과의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나희덕 시인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키워드가 있다면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수이 : 저는 키워드를 어떤 핵심단어로 정리하기보다는 시인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가 무엇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제가 생각할 때 나희덕 시인의 시에서는 경험과 미학이 어떠한 비율로 어우러지는가, 이게 나희덕 시를 결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두워진다는 것』이 시집에 이르기까지는 미학이 상당 부분 윗자리에 있었고 최근의 시에서는 거기에 경험이 좀 더 많은 비율을 얻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시영 : 사실은 저도 좀 궁금한데요. 김언희씨, 김혜순씨, 이수명씨도 있었고 앞에 많은 여성시인들 이름이 나왔습니다만 김언희씨 시와 나희덕씨 시의 거리는 정말 천지 차이 같은 거 아닙니까? 단순히 말하자면, 모더니스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말하자면 페미니즘 비평을 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나희덕 시인의 시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시죠? 그런 것은 어떻게 봐야 될 것 같습니까.

김수이 : 모든 독자나 평론가를 완벽하게 감동시키는 그런 작가나 작품은 사실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아마 나희덕 시인이 시에 대해서 갖는 가장 일반적인 불만은 시가 너무 단정하고 깔끔하고 정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삶의 구체적인 갈등, 격렬한 고뇌, 이런 것들이 읽히지 않기 때문에 조금 밋밋하지 않느냐, 이런 불만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겉으로 보여지는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하는 논리하고 비슷하게 얘기를 해볼 수가 있을 텐데요. 그 단정하고 깔끔하고 낮고 고요하다고 해서 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시영 : 자연스럽게, 김수이 선생의 리뷰에 대한 대응도 좋고 아니면 나희덕 시인 자신이 보는 자신의 시에 대한 이야기도 좋고, 이런 점을 말씀해주시죠.
나희덕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 시를 우호적으로 애정을 갖고 봐주셨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자리를 위해서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이 시집을 꺼내 읽어보니까 굉장히 낯설고 남의 시집 같았어요. 이 시집이 나온 지 3년이 됐고 이 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나"라고 하는 것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굉장히 다른 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그렇겠죠. 김수이 선생께서 몇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하셨는데 다른 여성시 계보 속에서 제 시가 가지는 특성, 또 자연과의 관계, 물론 제가 생태주의자이긴 합니다. 그러나 시에서 그런 강한 지향을 보이진 않았는데도 넓은 의미에서 생태시를 이야기할 때 제 시를 이야기하는데 그럴 때 자연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이나 "존재론" 얘기를 하시면서 고통에 대한 태도, 삶에 대한 태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서정적 주체가 위악적으로 어떤 것을 표출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단절도 완전한 동화도 아닌, 그 사이를 오고가는 균형감각 그런 얘기들을 해주신 것 같아요. 저로서는 여성시나 생태시에 관련해서 상당히 소재적인 차원에서 제 시를 읽고 모성성, 여성성을 이야기하고 생태시인으로서 자연을 상당히 아름답게 노래하는 낭만적인 시인으로 읽기도 하는데요. 그런 피상적인 읽기를 넘어서서 제가 고민했던 문제들을 잘 지적해주신 것 같아요.

제 시에 대해서 저도 사실은 규정이 잘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한 시인이 자기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밑그림을 선명하게 그려놓고 탐구의 주제를 정해놓고 공부하듯이 시를 쓰는 그런 시인들이 있거든요. 대체로 그런 시인들은 비평적인 담론으로 눈에도 잘 띄고 평론가들이 쓰기도 싶고 다양한 작가론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아까 제 시에 대해서 경험과 미학의 균형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최근의 시들이 경험을 더 앞세우게 됐다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는 대체로 보면 경험이 한 발 앞서가는 시인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뭔가 의식적으로 밑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삶이 저에게 주어지는 경험들을 어떤 점에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때로는 그것에 대해서 반항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삶이 나를 이끄는 것을 뒤척이면서 그 속에서 의식적인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화시키는 과정에서 시라고 하는 것이 나오죠. 사실은 그것을 하나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 과정 자체가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까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얘기할 때도 경계, 균형, 얘기를 하셨어요. 저도 그런 기질을 가지게 되는 것에 대해서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았고 이번에 시론집에서 그런 경향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제가 살아온 경험 자체가 경계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랬기 때문에 또 문학을 했던 것 같구요. 예를 들면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그 공간 속에서도 보면 부모가 없는 아이들과 일반적인 가정 그 어느 쪽도 아니었거든요. 보육원이라는 공동체 속에 살지만, 총무 딸로서 부모가 있는 제 입지라고 하는 것이 늘 뭔가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한다기보다 늘 양쪽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양자를 배려해야 되고 안으로 삭혀야 되고 하는, 어렸을 때부터 내성이 생긴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제가 시를 필요로 했던 것은 내면적으로 혼란스러운 것 때문이었거든요. 시대는 굉장히 격변해 가는데 여러 가지 모순들을 안고 있고 그런 속에서 제 개인이 왜소한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너무나도 없고, 그런 속에서 일상과 역사라고 하는 두 가지 어디에도 충실하지 못한 채 왜소하게 대학생활을 하고 그 속에서 고민들을 정리하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문학을 시작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그 역시 문학을 필요로 했던 동기, 그리고 80년대라는 상황 속에서 제가 살아왔던 방식,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그 또 역시 경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저뿐만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와 역사 속에서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위치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확정된 영토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확정된 영토 속에 속하는 순간, 작가는 이미 작가로서의 생동감이나 비판력 이런 것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많이 지배되어 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제 자신도 답답할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 쪽의 진실만으로 내 몸을 실어갈 수 없는, 그것이 바로 또 예술가가 처한 어려운 자리일 거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얼마전에 학생들하고 수업을 하면서 성장기 때 읽었던 『토니오 크뢰거』라는 한 예술가의 성장기를 다룬 소설을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어요. 토마스 만의 자화상이기도 할 텐데요. 아버지는 북쪽 덴마크 남자의 아주 이성적이고 품격 있는 귀족집안의 아들이었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남국의 정열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이었죠. 그런 속에서 토니오는 자기 안에 그 두 가지 피가 같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런 귀족집안의 아들로서 자기 신분과는 걸맞지 않는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점점 그것과 멀어지는, 늘 피를 어지럽히는 그런 문학을 하게 되죠. 그런 속에서 굉장히 예술가적인 오만을 한때는 가지기도 하고 인간적인 것이 아닌 정말 순수한 예술가로서의 귀족주의 같은 것들을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사람들의 웃음과 울음 이런 것들을 자기 예술 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끝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두 피의 결합에 대해서 수용하는 그런 모습을 보는데, 그 중에 그런 구절이 있었던 게 기억나요. 토니오 크뢰거가 사람들을 향해서,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나 같이 중도적인 예술가를 향해서 답답하다고 말하고 시민들은 나를 불량하고 그래서 체포하려고 든다" 그런 고민을 하는데 제가 바로 그런 경우 같아요. 해체적이고 극단적인 예술을 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늘 소시민적이고 답답한 예술가처럼 보였을 거고 또 일상인으로 돌아오면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데도 사회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백치처럼, 또는 약간은 불량한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늘 제가 시를 쓰는 자리, 고민하는 자리가 늘 그러한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시영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책을 보면 머리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동안 쓴 원고들을 정리하면서 새삼 발견한 것은 내가 대칭적 사회구조를 상당히 완고하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첨단의 노래와 정지의 미, 고향과 타향, 소요와 침묵, 전통과 반전통, 물과 불, 불귀와 미귀 등 대립적인 항목들을 오가며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보랏빛" 역시 경계의 색이다." 책머리에 이런 구절이 실려 있는데, 이것이 말하자면 극단적인 여성주의 시인들로부터는 미지근하다고 얘기를 듣고 또 다른 편에서는 그 반대의 이야기를 듣는, 경계에 선 예술가의 고민 같은 것들을 말씀해주셨는데, 나희덕 시의 특유의 미학이기도 하고 나희덕 시가 여성시 전체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유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 아마 이러한 경계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나희덕 시인이 여성성에 근접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모성성이라고 자기 시가 규정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반발을 하는 듯한 글을 쓴 적이 있지요?

나희덕 : 저는 시를 쓸 때 나는 여성시를 쓴다, 그런 자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시를 쓰는 시인들을 상당히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씌어질 수 있는 여성시의 한 전위가 분명히 있고 그런 전위가 있기 때문에 저 같은 복잡한 시인이 뜨뜻미지근하게 존재할 수도 있겠죠. 하여튼 저는 시를 쓸 때 생각해보면 나는 여성시인으로서 시를 쓴다고 하는 생각을 별로 안 가진 것 같아요.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시야말로 경계나 틀을 갖는다는 것이 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어떤 점에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그 여러 가지 정체성들을 동시에 살아내고 그것들을 넘나들고 또는 그 모든 것들을 시를 쓰는 순간은 내던질 줄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시영 : 그렇다면 자신을 생태주의 시인으로 규정짓는 것도 불만이시죠.

나희덕 : 요새는 생태시라고 하는 것도 90년도 초반에 생겨난 용어라고 할 정도로 비평적인 담론이 지나간 자리처럼 되어 있고 지금은 또 생태시에 대한 관심도 식은 것 같아요. 제가 여성시 생태시 이런 것들에 거부감을 갖는 것 중에 하나는 그것이 정말 시로서 시를 살려내는 일이기보다는 시를 갇혀진 자루에다가 묶어서 분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시가 하나의 열려 있는 그릇이라고 볼 때 그런 비평적인 담론들의 용어를 너무 쉽게 시에다 갖다 대는 것이 오히려 시를 고정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제 문학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합니다. 제가 문학을 시작한 것이 주로 "길과 숲"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매일 학교에서 나와서 학교 뒷산을 돌아다니고 했던 것들이 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거든요. 대학에 가서도 강의실보다는 학교 뒷산에 가서 보냈구요. 다만 자연을 그대로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 내면으로 끌고 들어와서 시를 쓴 거죠. 그런 점에서 자연이라고 하는 것을 제 안에 끌고 들어와서 또 다른 자연으로 만드는 과정인 것이죠. 어차피 시라고 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자연을 노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언어화되는 이상 자연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하겠죠.

이시영 : 시인의 이야기도 들어보았고 이제 구체적인 작품 이야기로 넘어가보기로 하겠습니다. 김수이 선생이 나희덕 선생 이야기를 듣고 특별하게 하실 이야기가 있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나희덕 선생 이야기를 듣고 제가 내린 나름대로의 생각은 시인은 어디에 함부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규정을 하려고 하는 게 소위 말하자면 정보전달체계로서의 현대 자본주의사회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 속성하고도 연관되는 것이 사실인데요. 시인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고자 하는 영혼이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규정당하려고 하지 않는 존재가 아마 시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수이 : 저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주 단순한 질문이고, 하나는 제가 평소에 궁금해 했던 부분인데요. 나희덕 선생님이 지금까지 산문집을 두 권을 내셨잖아요. 『반통의 물』이라고 하는 첫번째 산문집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읽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이 바슐라르 이야기를 한 거였어요. 바슐라르가 혼자서 딸을 키우는 홀아비 우체부였죠. 마흔이 넘어서 혼자 공부를 시작하면서 책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그것을 "존재의 테이블"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서 자신의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현실을 넘어서는 세계를 만들어나갔다는 이야기를 쓰시면서, 여담입니다만 예전에 제가 나희덕 선생님과 저녁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도 대학 강사를 하고 계셨고 저도 대학 강사를 굉장히 오래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얘기를 하다보니까 어마어마한 시간을 전투적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선생님께서 나도 바슐라르 같은 존재의 테이블을 하나 갖고 싶다고 얘기하셨는데 그 존재의 테이블을 아직도 갖고 계신지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시인이 일부러 쓰지 못하거나 쓰지 않는 부분이 있으신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나희덕 : "존재의 테이블"은 있습니다. 인도에서 여행을 하다가 목각으로 만든 작은 테이블을 하나 샀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고 그 대신 제가 제일 좋아하는 화분을 올려놓았습니다. 두번째 질문인 쓰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대부분은 제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쓴 거 같아요. 시인들은 워낙 자기의 삶의 사건들을 사실적으로, 산문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서 표현을 하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날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대부분은 제 삶에서 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쓰지 못하는 부분은 보육원에서 어릴 때 같이 자랐던 친구 이야기들, 그때 봤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피붙이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함부로 쓴다고 하는 것이 존재의 삶을 훼손시키는 행위가 되지 않을까, 그런 의식이 아직 있구요. 그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고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또 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시영 :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김수영 시를 읽어온 지가, 사십여 년이 넘게 그 분의 시를 읽어왔는데 김수영 시가 굉장히 어려운 것은 그가 모더니스트이기도 하지만 시인이란 자기 경험을 추상화시켜서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언어가 시인 자신의 삶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은 아니거든요. 세상의 일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산문이 없듯이 말이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제가 독자로서 소감을 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이 시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한편을 고르라고 한다면 「상현(上弦)」을 고르고 싶습니다.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이런 아름다운 구절이 있구요. 마지막에는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에서 "환한 상처" 같은 선명한 이미지로 구성된 표현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이 시집이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둠의 기조 속에서도 오히려 이 시집의 배경이 어둠 속에서 차오르는 초승달이기 때문에 역으로 능선 근처 나무들이 더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대로 가장 파격적인 시를 고르라고 한다면 「새를 삼킨 나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시는 아주 예외적일 정도로 세세한 진술을 생략한 채 석양녘에 "검은 입으로 새를 삼킨 나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섬뜩한 느낌마저 듭니다. 동시에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저녁의 가장 저녁다운 사물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맨 마지막 연이 화자를 등장시켜 결국 인간사의 세계로 끌어내리고 만다는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습니다.

「탱자」라는 시에서도 아름다운 구절이 있는데요.

"과즙이 향유가 되는 건/ 놀라움이 식지 않았을 때의 일"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새를 삼킨 나무」는 인간사의 돌연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시적 향유가 그만큼 증발하고 만 셈이지요.

「상현」다음으로 제가 가장 아름답게 읽은 작품은 「흰 광목빛」이라는 시입니다. 특히 맨 마지막 행에 "미륵 한쌍이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두 개의 점, 흰 광목빛"은 이 시집 속의 가장 눈부신 성취인 듯싶습니다. 시골 부부의 풀먹인 평범한 광목 목도리가 미륵의 눈부심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석불역(石佛驛)」도 아름다운 시이죠. "눈 녹는 역사 마당에/ 쓰러질 듯 서로를 고이고 있는/ 연탄재들"을 통해 "소신공양을 끝내고 막 돋아나는" 살빛을 발견하는 시의 눈이 신선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나희덕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진짜로 드러내고 싶었던 시세계는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와 「벽오동의 상부」같은 겹의 마음 혹은 어떤 사물이 지니고 있는 단단한 결집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정치한 시의 전개에 감응하면서도 시적 경이감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유성호씨가 발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나희덕 시인의 시는 이렇듯 때때로 너무 논리적 유추의 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겹의 마음도 존중되어야 하고 사물의 단단한 꿈들에 대한 시적 탐색도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시인의 지나친 시적 의도는 때로 시인의 시를 완고한 형식 논리에 가두어버리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나희덕 시인에게 오히려 "유희의 시편"들을 권하고 싶습니다.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라는 시는 친구의 죽음을 조상하는 듯한 시이지만 오히려 경쾌할 정도로 소란스럽지 않게 시의 격을 유지하면서 그 시격을 깨뜨리는 즐거운 파괴가 있습니다. 「불 켜진 창」또한 우연히 자기가 빠진 집안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경이의 시선이 살아있습니다. 「어떤 하루」도 찬찬한 묘사의 시이지만 발견의 신선함이 살아 있으며 「나비를 신고 오다니」도 비상에의 사뿐한 욕망이 숨쉬고 있습니다. 그밖에 「돌베개의 꿈」, 「언덕」등도 재미있는 표현들이 살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바로 시인의 이런 살아 있는 표현에 자신의 온몸의 숨결을 갖다대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저는 나희덕 시인이 어떤 정돈된 규격에서 벗어나 가끔은 이렇게 "나비를 신고" 비상하는 시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시인은 그 자신 안의 비평가를 의식하지 말고 시를 써야 한다는 것, 시인은 그가 시인인 줄 모르고 쓸 때 가장 좋은 시가 태어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나희덕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지적은 제가 굉장히 많이 들었고 제 자신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문학은 늘 뭔가를 버리는 행위라는 걸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시를 쓰는 과정에서 자기 완결성에 대한 욕구 때문에 비우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점검이 제 시에 "의미의 과부하"를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문학의 가장 본질은 오히려 하강하는 것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 문제는 더 자유롭고 더 가볍고 더 상승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쓰려고 하는 그 무거움을 더 철저히 무겁게 만들지 못한 것이라고 봐요. 아마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가벼운 상승"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무거움의 극한에서나 비로소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제가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잘 쓸 수 있는 시는 아마도 천상병 시인과 같은 자유로움보다는 인간의 고통에서 한발자국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 무거움을 고스란히 짊어지면서, 그러나 그 무거움을 과장되지도 않고 거짓되지 않게 그 고통의 무게를 담아서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가 제게 부여된 고유한 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질의· 응답>

문 : 혹시 시상을 떠올리실 때 고전시가에서 빌어 나오는 것이 있나요?

답 : 제가 고등학교에서 7년 정도 가르친 적이 있어서 고전시가들도 보고 한시나 18세기 실학파 시인들의 시를 즐겨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작의 동기로까지 이어진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문 : 초기 시집 『뿌리에게』를 보면 표제시에서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심정은 지금도 유효하신 건지,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 「뿌리에게」가 저에게는 등단작이자 아주 상징적인 시 같아요. 연한 흙처럼 끊임없이 자기의 자양분을 뿌리에게 줌으로써 하나의 생명을 키우고,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기는 또 벌레들을 자기 안에 키우고 그 벌레들을 통해서 자기는 또다시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는 생명의 순환적인 고리를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나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했는데, 제가 그 후로 쓴 자연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방식이라든가 시정신이 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그런 마음은 늘 갖고 있습니다. 저는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동력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면 너무나 범박해지는 것이고,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대상에 대한 수많은 사랑의 형태로 발굴하는 것들이 결국 한편 한편의 시가 되는 것이겠죠.

문 : 선생님께서는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 중에서 어떤 이미지를 가장 좋아하시는지요.

답 : 저에게는 대지적인 것의 이미지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 우리의 감각들을 서로 열어놓고 교차해서 만나는 지점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다양한 감각들을 동등하게 자기 몸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