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전문
응시 혹은 조용한 자아 성찰
고등학교 시절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처음 읽었다. 국어 참고서에서였다.
시인의 무서운 결벽증에 전율했다. 어떻게 사람이 감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는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어린 나이긴
했지만 난 그때 삶에는 많은 불결성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삶에 내포된 불결성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 결함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원초적 결함에 대해 드러내놓고 양해각서를 주고받지는 않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간주하기도 한다. 연민이란 감정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은 삶이 가진 원초적 불결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인정하기는커녕 잎새에 이는 바람마저도 자신의 탓인
양 끌어안고 괴로워한다. 시인의 성격이 낳은 필연적인 고통이다. 불가능태를 가능태로 바꿀 수 있기를 기원하는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같은
것이리라.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읽다가 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가만히 책을 덮고 밖으로 나왔다. 흐리고 어두운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 개의 별만이 총총 박혀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29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윤동주 시인의 삶을
생각했다.
난 아마도 이 시인이 옥사하지 않았더라도 결코 오래 살진 못했으리라고 단정했다. 이런 결벽증으로 어떻게 이 오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배겨날 수 있단 말인가. 지나친 결벽증은 사람에게 지나친 심적 부담을 안겨주기 마련이고 그 압박감은 자살로 이어지기도 하지 않던가.
사람들에게 있어 거의 대부분의 상처는 자신의 밖에서 발생하지만 결벽증이 심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자상(自傷)을 입힌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윤동주 시인이라고 해서 어찌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식은 그렇듯 명료하지만 쓰라린 감정마저 지우지는 못한다. 두어
박자쯤의 시간이 흐른 다음 시인은 가만히 중얼거린다. "오늘밤에도 (나의)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젊은 시절, 나는 이 마지막
구절을 "모든 별에게는 바람에 스치운 상처가 있다"라고 바꾸어 읽곤 했다. 바람(願)은 모든 상처의 시원(始源)이다. 바람으로 하여 내 자신에게
패인 상처가 깊은 날일수록 하늘의 별은 더욱 아스라하고 아름다웠다. "별을 보면 비다리타,/사나이라 할지라도/ 눈물이 흘러 비다리타". 남미
목동들이 부른다는 이 노래가 내 생애의 전편을 흐르는 'Thema music'인 셈이다.
나는 시인처럼 순결한 정신으로 삶의 길을
헤쳐나오지 못했다. 내 삶이 언제부터 삶이 가진 원초적 불결성에 안주하며 살았던 것인지조차 경계지을 수 없다. 윤동주의 '서시'를 처음 읽던
밤의 아름다운 별빛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건만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 순수의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다. 그러니 나의 별에는 얼마나
깊은 상처가 그어져 있을 것인가.
이 장마철 흐린 세상 속으로 숨어버린 나의 별은 영영 보이지 않는다. 흙탕물처럼 흘러온
우울함만이 가슴을 적시고 한줄기 시간의 시내 밖으로 아득히 흘러가서 후회의 강을 이룰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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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창선군 적량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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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이정록의 시 '서시' 전문
흠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에의
투신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에 실린 이정록의 '서시' 역시 자기 성찰을 보여주기는 윤동주의 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개인의 어둠 혹은 개인의 삶이 가진 불결성에 괴로워하는 내용이었다면 이정록의 시는 삶 속으로,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자신을 뉘우치는 시다. 나무의 삶과 사람의 삶을 대비시킨 시인은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안목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사실 잡티없는 순수한 영혼은 얼마나 해맑고 보기 좋던가. 반면 상처로 얼룩진 영혼이란 얼마나 일그러지고 흉한 모습이던가. 그러나
순수는 깊이를 축적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봄으로써 타인의 상처를 유추해낸다. 깊이란 그렇게 상처를 통해서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마을 밖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건 관념일 뿐이다. 상처가 두려워서 마을 밖에서 서성이는 것은 나약한 영혼에 지나지
않는다. 삶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비록 나무처럼
흠집이 생기고 상처를 받을지라도 마을을 떠나서 살아서는 안된다.
결코 윤동주 시인의 시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나 개인은 이정록
시인의 시를 더 선호한다. 응시하고 침잠하는 나보다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내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