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태준의 시세계에 대한 단상 ―
고명철
1. 유년의 마술적 풍경
문태준의 시에서 유년시절의 풍경은 마법화되어 있다. 문태준은 유년의 풍경을 마술적으로 다룬다. 유년의 풍경 중에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언정 그의 손에 걸려들면 여지없이 뭔가 특별한 시적 존재로 거듭난다. 하여 기술복제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문태준의 시는 독특한
예술적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물론 유년의 풍경에 주목하고 있는 시인은 문태준 이외에도 숱하게 존재한다. 유년의 풍경이란 시인에게 시적 영감을
제공해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어서, 시인 그 누구도 유년의 풍경이 자아내는 시적 매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태준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문태준의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유년의 풍경은 여느 시인들이 다루고 있는 유년의 풍경과 사뭇
다르다. 그가 유년의 풍경을 마술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유년의 풍경 자체가 마술적 힘을 간직하고 있어, 그는 이 마술적 힘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한마리 쥐의 주검을 담보로 생존하여갔다 무당의 공수에 기대어 어머니들이 생존하여갔다
“감히 니놈이 늙은 무당에게 그딴 생각을 하다니” 나는 돌부리가 많은 밤길로 쫓겨났다. 그때서야 감나무 이파리도 큰 뱀의 껍질처럼
무서워졌다 그 늙은 무당이 독을 품어 한 집의 황소가 넘어갔다고 소문이 돌았으니, 나는 가장 작은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가끔
마당에 소금을 뿌렸으며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 눕지 않았다 그후 그 무당을 보지 못했으나, 나는 달에 절을 하고 생솔가지에 불을 놓았다
무당의 공수에 기대어 나도 생존하여갔다 ― 〈비겁한 상속〉 전문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마을은 무당의 공수가
지배하는 곳이다. 조상과 신의 말씀을 전하는 “무당의 공수에 기대어 어머니들이 생존”을 유지하던 곳이다. 무당을 업신여길 경우 생존의 위협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마을이다. 마을의 길흉화복은 무당의 공수에 달려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당의 존재이기보다 무당의 ‘공수’가 갖는 마술적
힘이다. 이 ‘공수’에 기대어 마을의 생존은 유지되었으며, 시적 화자인 ‘나’의 생존도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대관절 무당의
‘공수’는 무엇인가. 시적 화자인 ‘나’와 시인 문태준은 ‘공수’의 어떠한 내용을 듣고 있는가. 어쩌면 문태준의 유년 풍경은 ‘공수’의 마술적
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시적 진실을 들어보자.
2. 의미를 거부하는 ‘무심한 풍경’
마술적 힘에
지배당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유년 풍경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죽음은 그저 삶의 풍경 속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풍경일 뿐이다. 그렇다. ‘무심한 풍경’일 따름이다.
당신이 죽어나가는 길을 내가 떠메고 갑니다 그
길은 멀어서 쑥이 많이도 피었습니다 당신이 이녘에서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한숨을 내려놓던 들길이며 돌꽃 핀 돌비석 앞이며 오래도록 물이
흘러가는 걸 바라보았을 나무다리며 깊게 파인 눈두덩 같은 살구나무 그늘이며 깊은 못가를 지나갑니다 당신을 위해 상여를 멈추었다 갑니다
― 〈당신이 죽어나가는 길을 내가 떠메고〉 부분
상여가 나간 마을에 군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흙을 파먹는 우엉뿌리
같은 군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상여꾼들이 짚가리처럼 모여 마른 떡을 구우며 저무는 하루 ― 〈상여가 지나가는 마을의 하루〉 부분
당신의 주검을 시적 화자인 내가 떠메고 간다. 그 떠메고 가는 길은 당신에게 그토록 낯익은 길이다. 삶의 신산고초를 지게에 지고
다니던 길의 풍경이다. 저승길은 이렇게 이승의 낯익은 길을 거쳐야만 한다. 이제 상여가 다 나간 후 마을에는 여느 때처럼 “군불 연기가
피어오”른다. 죽음은 마을의 일상 중 하나일 뿐, 그다지 특별한 일상이 아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죽음에 대한 주관적 감정이 배제된
체 상여나가는 풍경 혹은 상여가 다 나간 후의 풍경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주관적 감정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은
죽음도 마을의 여러 풍경에 속한 하나의 무심한 풍경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죽음을 무심한 풍경으로 다루는 것, 하여 그러한 풍경은 어떤
단일한 의미망으로 포착되는 것을 거부한다. 어떤 의미로 풍경을 해석해냄으로써 자칫 풍경 자체의 마술적 힘이 소거되는 것을 거부한다. 의미를
최대한 배제시킨, 하여 풍경 자체가 지닌 아우라의 매혹에 젖도록 한다.
문태준 시의 매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시적 의미와
시적 전언으로부터 자신의 시를 방(放)하길 원한다. 어떤 의미에 속박되고 싶지 않다. 의미에 나포되고 싶지 않다. 풍경이 지닌 마술적 힘을
이러저러한 의미로 규정짓고 싶지 않다. 그는 풍경 자체를 사랑한다. 그가 풍경을 사랑하는 데에는 풍경으로부터 인간의 삶의 비의성을 발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무심한 풍경 속에는 우리의 일상에서 간과했던 시적 진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올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올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 〈한 호흡〉 전문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비 ― 〈묵언〉 전문
시인은 꽃이 피고 지는 풍경에 주목하고 있다. 말없이 꽃을 피워내고 꽃잎을 떨어뜨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으로 인식한다. 꽃이
피고 지는 우주적 시간을 이렇게 ‘한 호흡’의 주기로 파악한다. 그것은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의 시간과 포개지는데, 아버지의 “홍역
같은 삶”이야말로 꽃이 피고 지는 ‘한 호흡’의 우주적 시간과 다를 바 없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이란 꽃이 피고 지는 ‘한 호흡’의 짧디 짧은
우주적 시간을 사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짧은 시간이 무의미하거나 허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꽃을 피워내고 지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주의 적막과 같은 ‘묵언’을 견뎌나가야 한다. 가쁜 숨을 고르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꽃이 피어오르는 그 절정의 순간에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우주적 호흡 말이다. 그럴 때 핀 꽃은 아름답게 지는 것이다. 이렇게 풍경은 탄생하고 소멸한다.
3.
성찰의 길로 인도하는 황혼의 풍경
이제 시인은 ‘한 호흡’에 불과한 삶을 살아간다. ‘한 호흡’의 우주적 시간 속에서 삶을
겸허하게 성찰한다. 그런데 이 우주적 시간 속에서 시인이 특별히 매혹을 느끼는 시간은 황혼이며, 황혼 속의 풍경을 더욱 사랑한다.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 〈어두워지는 순간〉 부분
시인에게 황혼 무렵의 저녁 풍경은 대단히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어둠이 내려앉는 순간에 지상의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의 지닌 형상을 숨기고, 서로의 형상을 뒤섞는다. 바로 이 순간에 풍경은 마술적 힘을 발산한다. 존재의 형상이 뒤섞인다는
것은 곧 개별 존재가 속했던 시간이 한데 뒤엉키는 것인바, 이 카오스 속에서 낯익은 풍경은 새롭게 인지된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버무림 속에서
망각하고 있었던 기억은 되살아나 지금, 이곳의 존재를 성찰의 길로 인도한다.
그런데 이 성찰의 길을 걷는 데 시인이 각별히 애정을
쏟고 있는 신체 부위는 맨발이다. 대지를 내딛고 있는 맨발이야말로 성찰의 진정성을 보증한다.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맨발〉 전문
어물전 개조개의 관족과 죽은 부처의 맨발을 포개놓고 있다. 이들 맨발에서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맨발이 움츠러들고 있는 데 대한 시간의 감각이다. 시적 화자가 개조개의 관족을 살짝 건드린 순간 껍질 바깥으로 나와 있던 관족은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간다. 이 느린 동작 속에서 시적 화자는 삶의 깊이를 헤아린다. 개조개의 관족이
거두어가는 속도처럼 우리의 삶도 숱한 곡절 속에서 천천히 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냥 빠르게 지나쳐왔던 삶의
매순간도, 저 우주의 광막한 시간을 염두에 둔다면, 개조개의 관족을 거두어가는 시간처럼 지극히 느린 시간에 불과하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겸허해진다. 저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시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바, 우리가 빠르게 인지하는 시간은 우주의 시간 속에서 한없이
차연(差延)된 시간에 불과한지 모른다. 시인은 이 시적 진실을 맨발을 통해 깨닫고 있다.
이처럼 시간에 대한 겸허함이야말로 시인이
유년의 풍경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가 아름답든지 추하든지 관계없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빨리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느림의
계기를 포착해야 하는 것이다. 하여 시인은 유년의 풍경에 한가로이 젖어들 수 있다. 여기 유년의 한가롭고 정겨운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다.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빛이 살고 있고 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
〈역전 이발〉 전문
어느 허름한 동네 이발소의 정겨운 풍경이 그려지고 있다. 요새는 이런 이발소 풍경을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급할 것도 없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역전 이발소에서 사람들은 한가로움을 만끽한다. 이발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이발소란 공간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삶의 여유를 느낀다. 이발소는 그렇게 우리들 삶의 휴게소였던 셈이다. 동시에 이러한 이발소는 어린 ‘나’가 어른의 세계를 훔쳐보는
곳이기도 하다.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며, 어린 ‘나’는 어른의 세계를 살짝 엿보기도 한다. 이발소는 이발 본래의 목적 이외에
동네 아이들이 어른의 문화를 간접 체험해 보는 곳이기도 하다. 시를 읽는 독자들 저마다 이발소에 대한 아련한 추억거리를 갖고 있다면, 이 시는
우리를 그러한 추억의 장소로 데려간다. 그 추억의 장소에서 유년의 풍경은 되살아는 것이다.
물론 유년의 풍경이 이처럼 정겹고
따사롭지만은 않다. 유년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움과 슬픔, 그리고 처연함마저 간직하고 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 〈호두나무와의 사랑〉 부분
지붕 위로 기어오르는
넝쿨을 심고 녹이 슨 호미는 닦아서 걸어두겠습니다 육십촉 알전구일랑 바꾸어 끼우고 부질없을망정 불을 기다리렵니다 흙손으로 무너진 곳
때워보겠습니다 고리 빠진 문도 고쳐보겠습니다 ― 〈빈집 2〉 부분
외할머니가 홀깨로 훑은 벼처럼 세월의 흔적이 그러하다
인기척 없고 뜰팡 하나 없이 집터만 남은 세월 십년 동안의 몽유 봄날 미나리꽝을 지나가는 텃물에 손목을 담근 것 같다
내 몸을 눕히면 봄볕을 받아주던 마루 깊은 젖가슴을 드러내던 아궁이 한때 이곳은 꽃의 구중궁궐이었으나 ―
〈옛집터에서〉 전문
성인이 된 시적 화자가 시간여행 속에서 마주친 유년의 풍경은 과거와 현격히 다르다. 전통적 농경의 삶은
근대화의 도정 속에서 급격히 해체된 지 오래다. 더 이상 과거 유년의 온전한 풍경을 목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여 쇠락해간 유년의 풍경과
맞대면한 시적 화자에게 밀려드는 정감은 슬픔과 처연함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녹슨 농기구를 손질하고 빈 농가의 허름한 부분을 고치는 일
뿐이다. 언제 다시 빈 농가에 살러 올지 그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채 말이다.
4. 스스로 놓여나는 풍경
문태준의
시를 동세대의 젊은 시들과 비교해볼 때 확연히 그 색채가 다르다는 데에는 이견을 갖는 자가 없을 터이다. 이것은 문태준 시의 특장(特長)이다.
지금까지 《수런거리는 뒤란》(2000), 《맨발》(2004) 등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한 시인의 세계는 분명 독특한 예술적 아우라를 갖고 있다.
문태준의 시세계에 대해 이성복 시인은 “어찌 보면 늙은 아이 같고 아이 늙은이 같”다고 한 바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문태준 시가 지닌 독특한
시적 전략을 묘파한 것으로 들린다.
분명, 문태준 시인은 이성복 시인이 지적한 바처럼 ‘늙은 아이’와 ‘아이 늙은이’로 볼 수
있는 면이 다분히 존재한다. 문태준처럼 유년의 풍경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시인도 드물기 때문이다. 유년의 풍경은 그에게 시 창작의 근원인데,
그렇다고 그가 유년의 풍경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다. 도리어 그는 유년의 풍경을 매우 담담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인생의 굴곡을 다 살아간 노인이
과거의 시간여행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발견해낸 유년의 풍경을 남들 앞에 툭 던져놓고, “봐라,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수놓고 있는
풍경들이 아니냐”는 말을 건네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그 유년의 풍경들은 심드렁한 풍경이며, 무심한 풍경이다. 그 풍경들은
욕심이 없다. 무엇을 기억하라며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우리 앞에 놓여질 뿐이다. 풍경의 그 자유분방함 속에서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 자유롭게 놓여난다. 따라서 문태준의 풍경은 인간을 구속하지 않는다. 풍경이 그 스스로 놓여나 있으니, 그 풍경을 접하는 인간도 스스로
놓여나 있다. 이것이 바로 문태준식 유년 풍경의 시적 진실이며, 시적 매혹이다. 우리가 이 시적 진실을 이해하며, 시적 매혹에 사로잡힐 때,
문태준 시세계 관류하고 있는 〈여울〉의 ‘지독한 사랑’의 진정성도 감지할 수 있으리라.
축축한 돌멩이를 만나 에돌아 에돌아나가는,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어라 문득 멈추어 돌이끼로 핀, 물이 그리워하는 소리를 들어라 사랑하는 이여, 처음도 끝도 없는 이 여울이
나는 좋아라 혀가 굳고 말이 엇갈리는 지독한 사랑이 좋아라 손아귀에 움켜쥐면 소리조차 없는, 메마른 물의 얼굴이어도 좋아라
― 〈여울〉 전문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문학평론가. 현재 광운대 겸임교수. 《비평과전망》 및
《리토피아》 편집위원. 저서로는 《‘쓰다’의 정치학》 《비평의 잉걸불》 《1970년대의 유신체제를 넘는 민족문학론》 《주례사비평을
넘어서》(공저) 등. 성균문학상 수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