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용어 / 다다이즘 (Dadaism)>
1916년 1차 세계대전 중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루마니아 태생의 시인 트리스탕 차라가 프랑스, 독일 출신의
시인, 화가들과 더불어 자신들의 전위적 예술에다 붙이 이름.
<다다>는 어린애의 무의미한 중얼거리는 소리를 흉내 낸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후 그들은 파리로 이동하여 국제적 화제에 오르게 되었고,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같은 급진주의적 시인들의
동조를 얻었다. 1922년에는 공식적으로 다다이즘의 사명을 다한 것으로 선포하고 그 장례식을 치렀고 그 추종자들은 대부분 좀더 이론적 근거가
확실한 초현실주의에 흡수되었다.
다다이즘은 우선 세계대전의 잔인성에 대한 항변이었고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부르주아 산업주의와 거기에
동조하거나 방관적인 예술, 특히 사소한 사실의 객관적 제시에 몰두한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 항변, 반발의 표현으로서
그들은 완전한 무의미, 비합리성을 그대로 드러낼수 있는 엉뚱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인쇄물의 방법만을 택하지 않고 몸짓과 육성으로
문학과 예술을 <공연>하였고 아무렇게나 주워 모은 듯한 사물이나 낱말들을 또한 아무렇게나 연결시켜 완전한 무의미, 비사실적 창작물을
만드었다. 그들은 또한 난센스에 가까운 선언문들을 많이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도적인 광태 밑에는 사회의 병폐에 대한 반항과 인간
정신의 자유를 향한 갈구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어느 시대에나 문학이 사회의 압력으로 위축되었을 때 있게 마련인 전위적
운동의 하나였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다다이즘은 이미 죽었지만 그와 비슷한 전위적 경향은 미국의 헤프닝 예술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그들 자체로서는 위대한 예술가와 예술을 낳지 못했다고 해도 새 시대의 촉진제가 된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