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깊고 단순하게 / 이수익
제가 쓴 시 중에 「寫眞師」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아마 70년대 초에 썼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시는 제가 시를 인식하는
방법 모두를 보여 주고 있는 듯해서 여기 서두에서
한번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처음엔 버릴 것부터
잘라가면서
나중에야 나무의 美學을 손질하는
園丁의
剪枝作業처럼.
시야에 비친 풍경 속에서 寫眞師는
먼저
버릴 것부터 생각한다.
버리고 버리고 버리다가
결코
버릴 수 없는.
그 一瞬 交感을 영상에
담으면
나머지 공허한 虛像의 풍경들이
울음 우는
카메라의 저 바깥 外界.
바로 이런 시입니다.
사진사가 한 절묘한 영상의 순간에 한편 작품의 탄생을 위하여 그의 총체적 영감과 지혜를 바치듯이, 그리고 그 나머지 피사체 영상들을 모두
버리듯이, 제가 처음으로 한 작품과 만나는 순간은 역시 그렇게 절묘하게 다가오는 한순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당신은
언제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되느냐는 질문을 하신다면, 그것은 제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어느 현실적 체험의 한 순간이거나 또는 책이나 TV, 신문
등을 보다가 문득 만나게 되는 사물과의 간접적 만남의 경우이거나 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그런 순간에 어찌하여 당신은 감동하면서 그것이 시의 소재가 된다고 판단하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뭐라고
객관적일 수 있는 답을 드리기가 어려운 것이, 그런 순간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도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관성의 배후랄까 또는 밑바탕에는
저의 개인적인 체험과 미적 감각, 사물에 대한 인식 체계, 심지어는 저의 성격까지도 작용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런 개별성을 두고 뭐라고 더 이상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제 저는 한 작품의 탄생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모티프Motif와 만나게 된 셈인데요. 이때
저는 대상(사물)이 뿜어내는 이미지 중에서 제가 작품으로서 다루고자 하는 어떤 주제를 생각해 내게 됩니다. 마치 어느 떠들썩하고 화려한 축제의
현장에 뛰어든 사진사가
축제의 전장면 중에서도 자신의 언어가 될 만한 장면에다 렌즈를 들이대고는 그 작품의 중심 주제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대체로 이런 극적인, 행복한 만남이 있을 경우 지체없이 작품을 써내려갔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저의 첫 시집 『우울한 샹송』이 만들어진 1969년 이전까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 대상과의 만남이
주었던 현란한 이미지와 몇 개의 관련된 표현들을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아 숙성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말하자면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보다 신중해졌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더욱 기능적으로 변모되었다고나 할까요, 어떻든 그때부터 제 마음 속에 떨어진 한 톨의
시의 씨앗은 한 편의 작품으로 태어나기까지 하루든 이틀이든 열흘이든, 아니면 아주 몇 달이든, 제가 원하는 모습의 시로 만들어지기까지 형태와
빛깔과 향기의 배합을 조종받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는 되도록 선명하게 작품의 형태를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모호한 것이 싫습니다. 저는 정확하지않은 상태가 두렵습니다. 저는 제가 감동받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제 작품이
때로는 정교하게 찍은 사진 같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표현했다는 표현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사진처럼 있는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려면 시가 제일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명하게
작품의 형태를 드러내고 싶다는 표현은 시라는 농축된 형식 속에 최선의, 최대의 표현을 담고 싶다는 말입니다. 매우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작품의 운명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될 때 갖는 한계의 자유를 매우 유효적절하게 통제해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는
‘선명한 이미지 표출’로 나타내고 싶습니다.
저는 간결함이 주는 미학의 힘을 더러 목판화에서 찾곤 합니다. 나무를 재료로 하는 목판화는
다른 판화 기법에 비해 단순하면서도, 칼맛이 주는 선묘의 질감이 심장에 와 닿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 故 오윤이나 요즘의 이철수, 이상국 등이
보여주는 단순명료한 묘사 기법은 그것이 생략해 버린 다른 대상들까지도 떠올리게 만드는, 건강한 힘을 느끼게 해 줍니다. 굳이 화면에 가득차게
설명이 들어 있을 필요도 없고 복잡다단한 관념이 무겁게 들어서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표현이 단순하면서도 엄격할수록 더 크나큰 공명이
오는 것을 저는 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선명한 시의 구조 속에 담기는 내용들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있겠지요. 묵은 향내가 번져야
할 그 내용이 설익고 떫고 비릿한 내음을 풍긴다면 곤란하겠지요. 표현되는 말과 내용이 충분히 자신의 것이 되도록 기다리면서 갈고 닦는 기간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물론 내용에 따라서는 단 한 시간만에 써질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요.
한 편의 시를 이루고 난 후에도
이따금씩 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치는 일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짜임새는 되어 있는지, 표현이 미숙한 부분은 없는지,
관념이 너무 노출되어 있어 튀지나 않는지, 묘사가 지나치게 평이하거나 상투적이어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미흡하지나 않는지. 이미지 묘사에
지나쳐버려 드라이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지, 더욱 생략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등등입니다.
어쩌면 이런 과정 자체는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대부분 유사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시인마다 서로 다른 작품이 나오게 되는 것은 각 시인의 지적, 정서적,
체험적, 그리고 생득적 편차에서 오는 결과라고나 할까요.